이야기舍廊/하루 에세이

어떤 죽음

취몽인 2011. 2. 8. 13:47

 

 

 

 

어떤 죽음

 

2011. 2. 8

 

  오늘 포털 뉴스에 최고은이란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실려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녀는 한예종 출신의 유망한 시나리오 작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채 피지 못한 재능은 투박하고 이기적인 영화산업의 구조와

예술에 대해 무지 또는 무관심한 사회적 합의 수준 그리고 그녀의 질병 및 취약한 환경으로 인해 슬프게 시들고 말았다.

그녀가 죽기 전 옆집 대문에 담겨 두었다는 쪽지가 가슴을 더욱 쓰리게 한다. '남는 밥과 김치가 있으면 내게 좀 달라. 내 문을 좀 두드려 달라.

내가 며칠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라는 메모. 그 메모를 쓸 당시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차가운 방에서 죽음을 맞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를, 예술을 생각했을까? 세상과 시스템을 생각했을까? 운명을 생각했을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요즘 집에서 미셀 푸코와 틱낙한을 번갈아 읽고 있다. 그 둘은 완전히 상반된 목소리로 행복을 이야기 한다. 한 사람은 동일자로 표현되는 세상은 

교활하고 타자인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이용만 당하기 쉽상이라 이야기 한다. 또 한 사람은 세상은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은 내 안에 있으며 깨달음만 있으면 고통은 그 행복에 큰 장애가 되지 않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젯 밤까지 나는 틱낙한스님의 의견에 동조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깨어 있으면 나를 괴롭히는 많은 것들은 그저 지나치는 시간과

상념 또는 번뇌에 불과할 수 있으리라 믿어보자 맘 먹었었다. 하지만 한 젊은 작가의 죽음을 보고 나니 그 이야기는 먼 하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푸코가 말한 동일자는 타자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적어도 이 시점에는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젯밤 TV에 나온 어느 탤런트가 한 말이 마음에 가시처럼 걸린다.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빌려 입은 모피 외투 한 벌의 값이 1억이었다.

입어 보니 그냥 털이더라. 비가 와서 망가질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괜찮았고 그 외투는 이미 팔렸다더라. 1억 짜리 모피 외투, 좋긴 한데 나름

신경이 쓰이는 불편함이 있더라.' 그녀의 말투에는 자신의 부를 우습게 여기는 모습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부를 우습게 여긴다.' 낯선 의미다.

부자가 가난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넘어 이제는 부자가 그 자신이 누리는 부를 우습게 여기는 사회. 그들은 푸코가 말하는 동일자들이고

오늘 아침 죽음을 전한 또 다른 그녀는 그들이 우습게조차 여기지 않는 가소로운 타자였을까?

 

  젊은 여류 시나리오 작가의 피지 못한 재능과 꿈.

푸코는 그러게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냐고 면박하고 틱낙한은 뭘 그만한 일로 죽었냐고 타박할 것 같다. 어쩌면 그들 또한 동일자들일 것이고

나는, 우리는 내 살을 저미는 듯 가슴 아파하는 천상 타자일 지 모른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지랄 맞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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