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행간
과제가 참 어렵다. 난감하기까지 하다.
제법 긴 시간 詩를 공부해왔으니 행 갈이, 연 갈이도 수 없이 해왔을 텐데 막상 그 의미를 되짚어보라니 막막하다.
아마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끊어가며 호흡을 조절하듯 그렇게 습관적으로 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호흡을 조절한다는 것, 그것이 숨 쉬는 행간의 일차적 역할이 아닌가 싶기는 하다. 서정시를 주로 쓰는 내 경우에 정조를 만들어
가면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반전이나 결구로 이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 갈이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때 연 갈이는 詩의 조형성을 고려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정형시의 형식이나 내재율을 담아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제는 ‘숨 쉬는 행간’이다. 그것도 이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많이 쓰이는 말 중에 ‘행간의 의미를 읽어라’는 말이 있다. 무심히 쓰는 말이지만 참 적절한 말이기도 하다.
특별히 詩는 운명적으로 서술보다는 비유와 절제, 응축, 묘사를 생명으로 한다고 할 때 행간은 시어의 선택이나 비유와 더불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기제가 되는 것 같다.
또한 비유가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미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면 행간은 詩의 형식을 통해 또 다른 거리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수단이 아닌가 싶다. 비유가 화학적 거리를 창조한다면 행간은 물리적 거리를 만드는 수단이 되는 것 같다.
행 갈이를 통해 행간에 침묵을 담기도 하고 전 행의 이미지를 증폭시키거나 반전시키거나 단절시키기도 하면서 詩는 구조와
이미지의 미적 완성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최근의 산문시들에서는 행 갈이의 모습이 많이 사라져 보인다. 하지만 단연 또는 몇 개의 연으로 길게 늘어진 산문시의 경우에도
숨겨진 행간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문장이 이어져 있을 뿐 詩를 읽어낼 때 자연스레 호흡이 정리되는 곳, 그 곳이 숨어 있는 행간일 수도 있다.
서술의 형식을 갖춘 詩라 할지라도 그 서술의 사이에 시적 거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詩의 완성도가 취약하다고 할 때 숨어 있는 행간은
이런 거리를 구조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행간의 역할은 그렇고, ‘숨 쉬는 행간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중언부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행 갈이를 통해 호흡과 거리를 만들어 낼 때 그 행간을 통해 시가, 또는 시인이 독자에게 독자 자신의
다양하고도 창조적인 이미지를 느끼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간은 진정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문장을 잘라 몇 개의 행으로 모양만 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치밀한 의도를 가지고 행간에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을
부여하는 것, 행간에서 활자 이상의 시적 정서를 느끼도록 하는 것. 그것이 시인이 견지해야 할 시적 창조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나의 행간은 지금 어떠한가?
부끄럽지만 위에서 너스레를 떤 이야기는 아직 내게서 멀다. 솔직히 말해 호흡, 율격에 대한 고려 외에 상상력이 숨쉴 무한한 공간으로서의
행간 창조는 이루어내지 못했다.
따라서 이 과제는 이런 습관적 행 갈이에 머문 나에게 행간을 제대로 다시 바라보고 생각하라고 내려치는
죽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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