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구직 / 김기택

취몽인 2011. 12. 29. 17:33

 

 

 

 

구직 / 김기택

 

 

 

 

여러 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를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 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 되면 미련 없이 걷어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대중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컹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번 입어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성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깎아주는 세상아닌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 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 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 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를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들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하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 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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