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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내는 더 낮은 음역에서 산다 –박형권-

취몽인 2013. 9. 4. 11:20

 

 

아내는 더 낮은 음역에서 산다

 

박형권-

 

 

아침 밥상에 올라오던 우유가 한 달째 뚝 끊어져

집에 돈 떨어졌구나 싶었던 그날도

집 앞에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 묵묵히 서 있었다

타이어는 뼛속까지 닳았고

칠이 벗겨져 검버섯 같았다

고단한 노년 같은 그것이 뒷심은 있어

새벽 네 시만 되면 푸다다다 시동을 걸어서 잠 깨기 딱 좋았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우유 돌리고 전단지 돌리고

비 오면 비에 맞고 눈 오면 눈에 맞을 그 젊음의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라고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그를 혹시 만나면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낼 줄 아는 젊음과 같은 골목을 쓴다는 것이 좋았다

나도 서너 살 젊어져서

아내의 배에 슬그머니 손을 올려놓는데

저 소리는 안 들리세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한 할머니가 우리 식구 먹을 우유를 두근거리며 가져가고 있었다

아내는

더 낮은 음역을 들을 줄 알지만

그동안 모른 체 하고 있었다

더 낮은 음역을 듣기 위해서는 내가 눈 내리는 소리보다

낮아져야 했다

 

 

<<박형권 시인 약력>>

*1961년 부산 출생.

*경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200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우두커니』.

출처 : 월간 모던포엠
글쓴이 : 이수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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