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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기형도

취몽인 2013. 9. 11. 12:42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