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붉은 스웨터/이민하

취몽인 2015. 7. 28. 16:03

 

 

 

 

 

-붉은 스웨터/이민하-


한 올만 당기면 풀어질 듯
입을 막고 있어서 우리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몸속에 둔 실마리를 들키지 않을 것처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에 엮여서
두껍고 따뜻하고 촘촘한 사람이 되었지만
손가락이 닿으면 파르르 떨리는

스웨터의 물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손끝에서 맥박이 섞이고

눈을 가만히 닫고 있으면
물려 입은 옷처럼 타인의 냄새가 난다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활용되고 있었던 걸까
깨끗이 빨아 입어도 낡은 슬픔뿐

어둠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입가에 붙은 미소를 보풀처럼 떼어 주며

스웨터보다 한 뼘 더 기어올라서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
검은 손은 내 것이 아닌데
당신은 내게 애원하는 눈빛이다

우리의 실마리를 쥐었다 놓았다
비릿하고 쫄깃한
어둠의 손맛

바닥에 누워 풀썩거리던
한 사람이 밧줄 더미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가볍고 뜨거운 핏방울이 한 코 한 코 솟구쳤다

허공의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어둠이 자리를 옮긴 쪽에서
벌새처럼 작은 사이즈 몇 벌이 첫울음을 파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