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삶’의 다른 표현처럼 쓰는 시인들이 있다. 이들은 생의 절벽 앞에 서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혹은 언어에 의해 절벽 앞으로 끌려 간다. 이들에게 언어는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일상을 중단시키는 장애물이다.
일상어의 틈새를 벌려 찾아낸 ‘시’라는 불지옥 속에 시인은 가만히 들어 앉아 버틴다.
그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수치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면 땀에 절어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시 쓰기는 기도가 되고 시는 격언이 되며 시인은 구도자가 된다.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극지의 시’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2002년부터 2015년까지 학생과 독자를 대상으로 시 창작수업을 진행하면서 한 말들을 다듬어 모은 것이다.
1977년 첫 시를 발표한 뒤 지금까지 40여년 간 쉬지 않고 밀어 붙여온 ‘구도(求道)로서의 시 쓰기’에 대해 친근한 말투로 풀이했다.
9일 출간 기념 간담회 후 서교동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따로 만난 시인은 사무실에 빼곡히 쌓인 신간들 앞에서 “낚시꾼이 카메라
앞에서 월척 들고 자랑하는 것 같지 않냐”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번 시론집은 계획에 없던 거예요. 강의가 쌓이고 이걸 글로 풀어 놓았더니 시론의 형태가 된 거죠.
여기에 제가 외우고 다니는 이야기가 몇 개 있는데, 선생 생활을 그만두기 전에 사람들한테 꼭 들려주고
싶은 몇몇 얘기들을 강연 형식으로 썼어요.”
그가 시력 40년을 다해 천착해온 화두는 윤리적 삶이다. 어쩌면 그에게 시는 “삶 앞에 마주 서게 한다”는 점에서만 가치가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정상적인 언어의 흐름을 교란시킴으로써 삶의 치부를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라고 말했다.
“카프카는 문학에 명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문학은 재주가 아니니까요. 문학은 차라리 물음이에요. 인간은 속이지 않고 살 수 없죠.
그 옆에서 ‘인간은 속이지 않고 살 수 없다’고 계속 말해주는 게 문학이에요. 그리고 묻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요.”
시인은 문학의 역할을 진동하는 풀 냄새로 비유했다. 풀을 벨 때 사방에 퍼지는 풀 냄새는 다른 풀들에게 도망가라는 경보 역할이라고 한다.
그러나 풀들이 도망갈 수 없듯이 인간도 삶의 진창에서 탈출하는 데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문학이 무력한 경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계속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자장 안에서 시는 고고하고 유별난 사치품의 자리를 떠나 구차하고 절박한 필수품의 자리로 내려온다.
‘정상적인 언어’가 실존의 사막을 은폐하는 거짓말이라면, 그 언어의 틈새를 벌려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섬광과 같은 문장”을 찾아내는
일은 천명이 된다. 그러나 언어의 특성상 이는 필연적으로 고행이다.
“인간의 정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분야가 시, 수학, 음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음악, 수학의 재료인 소리, 숫자와 달리
시의 재료인 언어는 말도 못하게 불순해요. 국가, 민족, 역사, 환경에 따라 언어는 끊임없이 왜곡되고 부정확해집니다.
저녁이란 말만 해도 낮에 가까운 저녁이 있고 밤에 가까운 저녁이 있는데, 이건 거의 부엌칼 갖고 박테리아 자르는 격이지요.”
그럼에도 시인은 언어 다루는 자들을 축복하고 격려한다. 삶의 막장까지 닿을 수 있는 언어의 기동력 때문이다.
“수학, 음악과 달리 언어의 장점은 우리 삶을 즉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질투나 강간을 숫자로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언어는 우리 삶의 최전선이에요. 모세혈관처럼 삶의 구석구석까지 뻗쳐 있죠. 언어가 없다면 피 안 통하는 부위가 썩듯이
우리 삶도 그렇게 될 겁니다.”
그는 최근 표절 논란으로 시끄러운 문단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다만 나이 들어 스러지는 나무를 비유로 들며
“잘 누워야 한다”고 말했다. “독자가 있으면 공인입니다. 끝까지 방심하면 안돼요. 가끔 제 시를 읽은 독자들이 저에 대해 쓴 글을 보는데,
그들 마음 속의 자리는 저 개인이 아닌 시의 자리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가들은 그게 자신이 발명한 자리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원래 있던 자리고, 발명된 게 아니라 발견된 거예요. 작가가 떠나도 그 자리는 없어지지 않아요. 그건 문학의 자리니까요.”
대구에서 살고 있는 시인은 3년 전 30년 간의 교수 생활을 끝내고, 지난해부터 산문집, 대담집, 시론집 등을 출간하며 문학에 대한
소견을 정리해왔다. 어쩐지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듯한 움직임에 그는 “그런 의도는 아니지만 앞으로 시집을 출간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시인으로서 내 전성기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딱 3년이에요. 그 후론 계속 시를 피해 다녔어요.
도망자 신세예요. 공부 못하는 애들이 계속 방 청소하고 세수하는 것 마냥 딴 짓만 하고 있는 거죠.(웃음)
내 생각이 늘 시에 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요.”
시는 무섭고 픽션엔 관심 없다는 그의 다음 책은 산문이 될 공산이 크다. 그는 발터 벤야민이나 나쓰메 소세키의 철학적 산문을 예로 들었다.
무엇이 됐든 시인의 언어는 우리를 깨우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 스스로 깨어 있고자 하는 한.
“병든 것도 언어고 우리를 병에서 깨우는 것도 언어예요. 언어 외엔 다른 게 없어요. 언어를 탐구하는 건 인생의 가닥들을 탐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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