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의 안쪽
詩 정철훈
사십구제를 마치고 하룻밤 묵으러 들어온 산방(山房)
파리 한 마리가 방안을 휘돌아치며 붕붕거린다
천장이며 벽이며 창문에 몸을 찧기 여러 차례
허공이 있었는지도 깜박했는데
파리 한 마리가 허공에도 길이 있다며
갈지자로 휘적거린다
허공 안에 또 한 겹의 허공이 있다는 듯
머리가 깨져라고 부딪치는 날파리
망자는 어디로 간 걸까
화장터에서 곱게 빻아온 유골 단지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속에
망자가 없는 건 분명한데
파리가 그려놓은 허공이 내 안에 가라앉고 있다
나는 마당에 나가 달 구경을 하고
날벌레들은 방안에 들어와 형광등 구경을 하고
내가 망자에 대한 생각으로 골똘해 있을 때
파리며 하루살이며 나방이며 질겁한 날벌레들은
망자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영혼의 벽에
쉴새없이 부딪치고 있다
파리가 그려놓은 허공의 안쪽
붕붕과 휘적휘적 사이
* 정철훈 시집 ≪빛나는 단도≫ (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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