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하루 에세이

도서관에서

취몽인 2017. 3. 9. 20:28

며칠째 도서관으로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삼월 한 달은 그냥 놀자 맘 먹어 쫓기는 마음을 되려 쫓아 놓았지만 그렇다고 종일 침대에 누워 딩구는 건 아내의 불안을 초래하고, 그 불안은 곧 불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경험으로 익힌 터라 눈 뜨면 집을 나서 도서관으로 옵니다.

 

몇 가지 먹고 살 일들은 궁리끝에 마련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도 단기미봉책에 그칠 것이니 좀 더 나이 먹고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방도를 찾다 자격증 하나 더 따기로 맘 먹었는데, 남은 시험 준비 기간에 비해 공부량이 그리 많지 않아보여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의 80%는 책을 읽습니다.

 

지금은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좋다고 마냥 이 놈만 읽는건 제 처지에 사치란 생각이 자꾸 들어 한 시간 반 읽고 삼십분 자격증 교재 공부하고 또 한 시간 반 읽고.. 뭐 이러고 있습니다.

 

도서관 열람실 좁고 딱딱한 자리가 책 읽기에는 제격입니다. 집 침대에서라면 읽다 졸다 자다 할테니까요. 엉덩이가 아프면 정기간행물실에 가서 문예지를 읽기도 합니다. 오늘은 현대시학 한 권을 다 읽고 왔네요. 그래도 아직 창비, 문학동네 등 읽을거리가 쌓여있어 마음 바쁜 부자 심정입니다.

짬짬히 관외대출실로 내려가서 다 못 읽고 반납한 오규원 전집도 페이지 접어가며 몇 편씩 읽곤 합니다.

 

한 삼백석 정도 되는 열람실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크게 나눠 두 부류입니다.

먼저는 청년들로 취업준비나 시험준비하는 친구들입니다. 츄리닝 바지에 슬리퍼 차림의 부스스한 물골로 책상에 머리를 박고 다들 분투중입니다.

쉬 받아주지 않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저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공부보다 더 힘든 좌절과 분노, 슬픔과 싸우고 있는 듯 보여 안스럽습니다.

그 다음 부류는 저보다 한 오년, 십년 어린 사십대 장년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달려온 인생의 궤도에서 자의건 타의건 이탈된 이들이지 싶습니다. 그 궤도로 재진입하고자 모두들 비슷비슷한 수험서를 앞에 두고

씨름중인데 쉽잖아 보입니다. 그외에는 시간 떼우러 온 중늙은이들 몇이 어슬렁 거리는 정도.

결국 이 도서관은 무슨 패자부활전이 열리기전 대기실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패배, 낙오, 이런 이미지가 볼펜 떨어지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에 묻어 칸막이 위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그 가운데 앉아 한가하게 시나 인문도서를 읽고 있는 제 처지가 무슨 축복같아 보이니 참 철없는 마음이지요. ㅎ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웃으며 다음 연극의 막이 오를 시간을 기다리는 수 밖에요.

 

자, 지금부터는 다시 자격증 공부 삼십분 시작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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