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하루 에세이

대선

취몽인 2017. 4. 10. 13:10

오늘이 4월 10일, 대선은 5월 9일, 한 달이 못남았다.


망신살 대통령을 구치소로 보내고나니 어렵사리 봄꽃이 활짝 폈다.

낮은 언덕마다 요란한 봄꽃 뒤로 수천만개의 연두색 별빛이 가득하다.

그 봄꽃과 연두빛 여린 새싹을 보며 요란한 후보들과 그 뒤의 순진한 희망들을 떠올려본다.  


상황논리 속에서 얼떨결에 앞서가는 자와 그를 주저앉히고자 목청을 돋우는 이들을 보면

먼저 핀 개나리와 뒤따르는 벚꽃같다는 생각을 한다.


개나리는 유성생식을 하지 않는다. 제 할애비, 제 애비, 제 형제의 팔뚝을 잘라 휘묻어 번식을 한다.

따라서 축대위 노랗게 성을 쌓은 개나리의 아우성은 본디 꽃이란 게 생식을 위한 최선의 함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참 의미없는 아우성인 셈이다. 척박한 비탈에 기대어, 절실한 생존의 양식이 아닌

끼리끼리 휘묻어 구성된 어설픈 번성. 그 만개에 대단한 기대는 없다. 열매도, 장작개비 하나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봄은 오고 맨 먼저 봄을 웅변하는 그들을 보며 아, 봄은 이렇게

오고야 마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겨울이 갔으므로 봄은 롤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의 유용성에

의문을 갖지만 새로운 계절을 활짝 열어주겠거니 하는 그 시간적 현시를 나는 목하 바라보고 있다.


개나리가 도열하는 군중의 모습으로 봄을 연다면, 벚꽃은 작렬하는 스타의 모습으로 핀다.

시들한 모습으로 움을 틔우다 한 시에 폭발하듯 터져나온다. 개나리 축제는 없지만 벚꽃 축제는

도처에서 열린다. 화사한 연분홍의 난분분, 그 분출에 맞춰 장이 열리고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축제는 늘 누군가에 의해서 기획된다. 금년 같은 경우는 시기를 잘못 맞춰 꽃 없는 축제가 끝나자

그제서야 꽃이 쏟아져 낭패를 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가슴에 바람을 일으키는 벚꽃의 만개는

오래전부터 그 땅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사람들의 의지가 담겼다. 올해의 벚꽃은 특히 더 그렇게 보인다.

내 오랜 뚝방길, 그 길의 호사를 개나리에게 넘겨줄 수 없다. 뿌리마다 들쑤셔 꽃을 민다. 향기는 관계 없다.

남은 시간은 한 달. 화사함의 합창으로 세상을 속이자. 그렇게 꽃을 밀어 올리는 작자들이 보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벚꽃의 미덕은 짧은 것이고, 개나리의 미덕은 제법 끈질긴 데 있다.

지금 똑갘이 활짝 터져 빛나지만 차분한 봄비 하줄기 내리고 나면 하나는 지고 하나는 여전할 것이다.

지는 벚꽃은 그나마 낭만적이다. 하지만 지지 않도록, 축제가 연명할 수 있도록 벚나무를 붙들고 매달리는

미련 또한 여전할 것이다. 근본 밖에 없는, 형제 자매끼리 어깨를 엮어 노랗게 누렇게  버티는 개나리를

폄하할 것이다. 사실 벚꽃도 개나리도 꽃일 뿐이다. 둘 다 아름답고 둘 다 피었다가 지는 상징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 팔 뻗어 비탈길을 세워가는 개나리 가족이 장사 속으로 일시에 터뜨리는

벚꽃 거리에 밀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속지마라. 벚꽃은 스스로 핀 게 아니다.


201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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