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좋은 詩 모음

죽은 줄도 모르고/김혜순

취몽인 2017. 5. 10. 17:56

죽은 줄도 모르고 /김혜순

 

 

죽은 줄도 모르고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데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서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로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 마디 쩝쩝거리며

관뚜껑을 스스로 끌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