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19
새해는 신문사 대목날.
80년대 중후반 무렵은 신문광고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광고 매체 자체가 TV, 라디오, 신문,
잡지의 이른바 4대 매체가 중심이
었지만 탄력적 시점 광고 집행이
가능하고 제작비도 저렴하면서
무엇보다도 기업 입장에서는 홍보
활동을 위해 신문사와의 긴밀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특수성까지
더해져 신문광고의 영향력이 TV
광고보다 더 컸었던 시절이었다.
년말이 다가오는 이즈음이면 대기업
홍보 광고부와 각 광고대행사에 작은
비상이 걸렸다. 새해 첫날 제하 일간
지에 실릴 근하신년 기업이미지 광고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주요 일간지들은 신년호 발행
면수가 지금 기억으로 40~50면쯤 되었
던 것 같다. 일면에 어김없이 동해 일출
사진이 실리고 각종 신년특집 기사들을
실은 신년 특집호를 발행했다.
그리고 특집기사보다 훨씬 더 많은 면이
각 기업들의 근하신년 기업이미지 광고가
실렸었다. 회사 규모에 따라 달랐지만
대략 30대 기업 정도이면 모든 일간지에
빠지지 않고 전면 컬러로 광고를 실었다.
어렴풋이 기억을 짚어보면 우리 회사의
경우 년 광고 예산의 약 5% 정도가 신년
광고비로 책정되었던 것 같다.
그때도 삼성, 현대가 본지 백면, 별지 백면
등을 차지했고 그 이하 순위의 기업들이
각자의 상대적 지위에 맞는 면을 차지했었다.
언론 통폐합 전이었으니 일간지 수도 제법
많았다. 신문사 입장에서는 창간 기념일과
더불어 일년중 광고 수입이
가장 많은 날이었을 것이다. 찌그러들 대로
찌글어든 지금의 종이 신문 입장에서는 꿈
같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쨌던 이 근하신년 기업이미지 광고를
만들기 위해 각 기업과 대행사는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연말은 바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기업이미지 광고는 지금 생각하면
과도기였다.
"세계 최고" "국내 제일" 따위의 헤드라인을
위에 얹고 웅장한 사세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1세대 기업광고가 아직도 많았고,
쌍용의 "도시락광고"를 거의 효시로 하는
조일광고(조선일보 광고공모전) 스타일의
유니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간접적
호의도 제고 이미지 광고가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가는, 다시 말해 기업 PR이 생산자
중심 메시지에서 소비자 중심 메시지로
옮겨가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당시 우리회사의 광고 대행사는 롯데계열의
D기획이었다. 종각 근처에 있었던 D사 회의
실에서 연일 회의가 열렸었다.
아직은 사세를 보여주는 광고를 해야 한다는
관리자들의 주장과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참신한 아이디어를 찾아야한다는
젊은 팀원들의 의견이 주로 부딪혔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 광고 인생을 좌우할
한 선배를 만나게됐는데 그는 당시 D기획의
국장이었다. 동아일보사태 해직기자 출신인
K국장은 광고주로서 광고 바닥에 어설프게
발을 들여놓은 내게 마치 하늘의 존재처럼
보였다. 해박한 광고 및 마케팅 지식,
그리고 전략적 크리에이티브 등 등.. 회의를
이끌고 아이디어의 방향을 조율하는 K국장을
보며 광고쟁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분 이야기는 또 기회가
되면 다시 하기로 하고 하여튼 회의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신문 전면에다 잘난 척을 한들 수십
개의 광고 속에서 우리 광고가 보일까? 그럴
바 에는 아예 지면의 95% 를 백지로 두고
한 5% 정도에다 깔끔하게 회사 이름을 걸고
한두마디 새해 인사만 하면 오히려 눈에도
잘띄고 참신하다는 이미지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끝에 내 생각을 회의 자리에서 말했다.
모두들 신입사원다운 치기어린 발상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내 아이디어가 묵살되는
순간 회의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나를 보고
웃음띤 시선을 보내고 있는 K국장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 찰라가 또 한 번 나를
광고바닥에 주저 앉히는 순간이었다 싶다.
우리회사 기업 이미지광고는?
2만평 부지 위에 들어선 대규모 생산플랜트를
항공촬영으로 스케일있게 찍은 사진위에 찬란한
서광이 비치는 일러스트를 합성한 이미지,
그리고 세계 최고의 기술로 섬유 대한민국을
이끄는..어쩌고 하는 카피가 대문짝만하게 얹힌
고전주의 작품으로 전국 일간지 전면 광고로
거하게 실렸다.
고전적, 보수 꼴통적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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