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에세이

가난 속으로 180301

취몽인 2018. 3. 1. 13:40

가난 속으로

 

돌이켜보면,

내 돈이건 남의 돈이건 간에

쓸 수 있는 돈이 많았을 때

나는 퇴행했었다.

그게 내가 가진 남의 돈이었을 때,

퇴행의 여진이 오래 갔을뿐.

 

반면에 가난했을 때,

절박했을 때를 지나며

지금의 일천한 자각들이 생겼다는 생각도 든다.

자존심의 무의미,

거울 속의 별 볼일 없는 한 남자,

부자가 될 수 없는 팔자 또는 천성,

상선약수 같은 것들.

 

누군가

'자발적 가난'이란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가 지키고 싶은 가치를 위해

그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풍요를 거부했는지 모른다.

나는 현재 '부여된 가난' 속에 있다.

아마 특별한 은총(?)이 없는한

이 상태 대로 삶을 끝내거나

좀 더 나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난을 즐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내 정신의 진보가 비롯된

그 진창의 깊이 속에서

오십 년 동안 쌓인

잉여를, 쾌락을, 껄덕댐들을 거듭 버리고

얇고 가볍게 살아볼 일이다.

 

오후에는

옆구리 비계처럼 붙여놓은

전화번호들부터 좀 지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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