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쇠
시를 읽다가
혼자 좋아서
희죽 웃다가
문득 깨닫는 것
시는
이런 훌륭한 시인들이 쓰면 되지
나 같은 벌티는
그저 읽고
감사하면 되지
그럼에도
문간을 떠나지 못하고
얼쩡대는 건
허명을 바라는 미련함 때문이지
주제를 알아
예술 따위는 포기하고
그저 주절거리는 걸로 위안을 삼아도
시는 내게 할 일 다하는 것을
그래
나는 주절을 쓰고
시는
시인들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
깍지 않는
녹슨 철편 한 조각으로
사는게
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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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왕
머리에 종이 금관
금관에 열쇠왕이란 글자
주먹코안경
열쇠 자물쇠 주렁주렁 달린 조끼 벗고
겨울바람 피해 농협 현금자동지급기 코너에서
콜라에 빵을 먹고 있는 할아버지
온수리 장날은 헐겁고
할아버지는 수많은 열쇠를 깍아 무엇을 열었을까
현금지급기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
압축된 내 삶 같은 직불카드를 들이밀면
내 몸뚱이는 무슨 열쇠일까
무엇을 열겠다고 세상을 떠돌아왔는가
하 많은 자물쇠를 만났는가
혼자여서 쩔렁거리지도 못하는
내 몸은 무슨 열쇠인가
꿈에는 가끔 무엇을 열어보았던가
탈칵 멸리는 게 뭐 있었던가
열리지 않음만 실컷 열다가
상처로 깎은 열쇠가 되어
결국
이 악물고 호흡 끊으며
죽음만 비틀어 열고 말 존재인가
찌개용 돼지고기를 사려고 돈을 찾고 있는
잔금에 신경 쓰는
나는
아직 내 몸이 무거운, 열쇠가 되지 못한
철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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