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어려움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모리스 블랑쇼의 말대로라면 글쓰기란 언어를 ‘매혹’ 아래 두는 것이다. 언어가 매혹의 주술을 잃을 때 권태가 몰려온다. 껍데기들의 연속체, 반복, 낭비된 시간, 거짓말, 가식의 웃음 혹은 눈물. 글쓰기는 이런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는 것이다. 좋은 글은 함부로 소진되지 않는다. 그것은 퍼내도 자꾸 고이는 샘물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드러낸다. 휴지처럼 버려질 운명, 모래 무덤의 문턱에 글자들이 다가갈 때, 글쓰기는 중단된다. 글쓰기는 정신의 소비이다. 계속 글을 써도 영혼의 잔고가 많이 남아 있으려면, 쓰는 만큼 혹은 그 이상 영혼의 금고에 많은 것을 쌓아놓아야 한다. 그래서 비단 글을 쓸 때만이 아니라, 글, 즉 매혹의 글을 읽을 때 그는 이미 매혹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글쓰기의 소비를 잘 계측해야 한다. 영혼의 이자가 채 붙기도 전에 (글쓰기의) 소비를 할 때, 정신은 위기를 겪는다. 그때, 남아 있는 영혼의 잔고는 그것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매혹의 색채를 잃는다.
글쓰기의 매혹은 두 가지 방향으로 온다. 하나는 글쓰기가 진실을 건드릴 때이다. 개 같은 고통을 감수하며 글이 배리(背理)의 세계를 건드릴 때, 글은 만 가지 뿌리줄기(리좀)를 가지며 그것을 읽는 정신의 세계로 스며 들어간다. 글은 이렇게 혼란의 이름으로 영혼을 깨운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 자체 배리이며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날을 가진 글은 먼 구석기의 그림에 불과하다. 글은 만 개의 날을 가지고 만 개의 세계를 쑤신다. 글이 세계를 찌를 때, 세계는 만화경처럼 색깔을 바꾸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혼란이며 화려한 폭발이고, 대답 없는 진실이며, 대답을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두 세계의 만남이다. 보라, 단순성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대로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중에 산산이 녹아내린다.” 견고한 것들, 단순한 것들, 뻔한 것들, 권태로운 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글쓰기는 단순성이 만들어내는 거짓과 권태와 싸운다.
매혹의 글쓰기는 두 번째 길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는 모든 사물에 오래도록 붙여진 이름들을 조롱한다. 세계는 낡아빠진, 녹이 슨, 먼지가 가득한, 혹은 빤질빤질한 관습으로 가득 차 있다. 글쓰기는 썩은 간판들, 지겹도록 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름들을 지우고, 바꾸고, 갈아치운다. 견딜 수 없는 권태란 없다. 모든 권태는 파괴되기 위해 존재하며, 글쓰기는 먼 아담의 시대에 신이 하사한 주권으로 권태의 집을 때려 부순다. 매혹의 글은 이 파괴의 먼지와 소음과 혼란과 번개의 빛으로 소란하다. 모든 이름은 그 자체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는, 오직 낡은 집의 완고한 소유자들뿐이다. 글쓰기의 외로운 전사들은 수많은 이름들의 창고 안에서 파괴를 꿈꾼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낡은 이름의 소유자들이며, 그것들은 오로지 혐오와 파괴에 의해서만 “공중에 산산이 녹아내린다”. 보라, 우리는 이름을 바꿔 친 빛나는 텍스트들의 집을 본다. 그것의 광채는 매혹 그 자체이며, 세계의 재구성이다.
그러므로 배리의 심장을 건드리지 않을 때, 그리고 낡은 이름들을 파괴하지 않을 때, 글쓰기는 중단된다. 매혹을 잃은 게임은 무료함의 공수표(空手票)들이다. 그것들은 아무리 쌓여봐야 영혼의 금고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 개나 소나, 아무나 가져다 써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종잇조각들을 우리는 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좀 먹은 영혼이며, 읽는 이들을 좀 먹게 하는 정신이다. 글쓰기는 책방에 넘치도록 쌓여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만한 정신들을 혐오한다. 누가 글을 쓰는가. 매혹의 개 같은 고통을 견디는 자들이 글을 쓴다. 블랑쇼의 책 제목대로 글쓰기는 오로지 “도래할 책”을 쓴다. 저기 책이 오고 있다. 옛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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