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 는 그 자신이(<문학의 공간>에서) 밝히고 있듯이 글쓰기의 본질을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찾고 있다.
탁월한 예술의 힘으로 명계로 내려가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돌아오는 오르페우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마지막 초조함을 참지 못해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계로 사라져 간다. 이때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얼굴에 닿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블랑쇼는 문학이 끊임없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부재의 순간, 작품에 다다르는 순간에 거기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문학의 숙명을 읽어낸다.
작가는 작품을 향하여 나아가지만 그가 이루는 것은 한 권의 책일 뿐이고, 그는 곧 작품에서 쫓겨난다.
블랑쇼는 바로 이러한 부재가 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주체가 명료한 의식 속에서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설명하고, 그것이 독자에게로 곧바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모호한 웅얼거림을 드러내어 보여 주거나 들리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내려가는 것은 에우리디케를 향해서이다. 에우리디케는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 이를 수 있는 극단이고, 그녀는 그녀를 숨기는 이름 아래, 그녀를 덮은 베일 아래 예술, 욕망, 죽음, 밤이 그곳을 지향하는 듯한 몹시도 어두운 지점이다. …
이 ‘지점’, 하지만 오르페우스의 작품은 깊이를 향하여 내려가면서 그 지점으로의 접근을 보장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 그것은 그 지점을 낮으로 데려가고, 낮 속에서 거기에 형태, 형상 그리고 현실성을 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이 ‘지점’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밤 속에서 밤의 중심을 바라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그는 그 지점으로 내려갈 수 있고, 보다 강한 능력으로 그는 그 지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자신과 함께 그것을 위로 끌어당길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면서. 이러한 벗어남이 거기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이 밤 가운데 드러나는 숨김의 의미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그의 이주의 움직임 속에서 그가 이루어야 할 작품을 망각하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필연적으로 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움직임의 궁극의 요구는 작품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 지점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서 그 본질을 붙잡는 것이다.
여기 그 본질이 나타나는 곳에서, 여기 그 본질이 본질적이고 본질적으로 나타난 것인 곳에서, 밤의 한가운데서.”
문학은 18세인 1925년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만나,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간 블랑쇼의 사유가 ‘절대적 허무’로 빠져들지 않고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로 나아가는 출발점인 것이다.
블랑쇼가 48세의 나이인 1955년에 출판한 <문학의 공간>은 시간적인 측면에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나 블랑쇼 전체 저작의 중심에서 그 사유의 전체를 보여 주고 있다.
'이야기舍廊 > 詩와 글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쓰기의 어려움 /오민석 (0) | 2019.12.10 |
---|---|
현대시작법 / 오규원 (0) | 2019.12.03 |
[스크랩] "시 한 편 4년간 80번 고쳐 써, 나보고 몹쓸 병 걸렸대" (0) | 2016.12.23 |
형식에 이르다 / 김혜순 (0) | 2016.08.02 |
■ '시인의 의무'/ 장 미셸 몰푸아(프랑스 시인) (0) | 2016.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