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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allegory), 타입폴로지(typlogy), 아날로지(analogy)

취몽인 2019. 12. 30. 10:55

알레고리(allegory), 타입폴로지(typlogy), 아날로지(analogy)

 


Ⅰ. 알레고리(allegory)

유대 미드라쉬는 쿰란 공동체의 페세르를 비롯해서 각주, 인용, 암시, 변형, 유추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는 구약해석을 폭넓게 활용하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구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틀로 교회에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주전20-주후 약50년)가 구축

하였던 알레고리이다. 필로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가 하나님께 대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되거나, 성서 본문에 문자적 의미와 알레고리

적 의미가 공존한다고 생각될 때, 말씀의 깊은 뜻을 알레고리에서 찾았다. 가령 어떤 본문에 동의어가 사용되거나 히브리어의 말장난

(play on words)이 활용되고 있다면, 그는 그 본문의 심오한 사상을 주저 없이 알레고리로 해석하였다. 참된 해석이라 문자 뒤에 숨어 있는

 뜻이라고 보았다.

성서 해석사를 들춰보면 알레고리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라났다. 필로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고 그 뒤를 클레멘트(주후 155-215),

오리겐(주후 185-254)등이 따랐다. 그들은 구약의 문자나 사건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삶, 죽으심, 부활에 상응하는 상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에 의하면 사람이 몸, 혼, 영으로 구성되듯이 성서 본문도 문자적 의미(몸), 도덕적 의미(혼), 영적의미(영)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판가름하는 규정을 살펴보자. 그들에 따르면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된”(레11:3)정결한 짐승이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도덕적 품성을 상징하고, “되새김질하는”(레 11:3)짐승이란 “말씀을 늘 반추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품성을 의미한다.

알레고리는 “타입폴로지”(typology)다르다. 알레고리는 타입폴로지와는 달리 본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폰라드가 이점을 잘 지적하였다.

“해석학적으로 알레고리는 아주 다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레고리는 영적인 해석의 문제에 있어서는 고삐 풀린 자유를 갖고 있는

만큼이나 본문의 글자 하나하나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모형론은 단어나 문자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자유롭고 역사적 의미에 훨씬 더 묶여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모형론은 역사에 훨씬 더 강력하게 부착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진리들이 아니라

사실들과의 연계에 관심을 갖는다”

타입폴로지, 곧 모형론은 구약과 신약에 있었던 사실들 사이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를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반면 알레고리는 어떤 문자의

영적인 진리들을 알아내는데 더 집착하고 있다. 폰라트에 따르면 모형론적인 구약 해석은 이른바 영적인 해석으로 치닫는 알레고리의

홍수로부터 구약의 본문을 보호하는 해석학적 방법이 된다.

주후 1세기이래 교회의 성서 해석은 성서 본문의 이차적 의미, 곧 알레고리를 본문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숭상하는 분위기에 빠져든다. 주 후

3-6세기의 교회가 본문 해석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본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숨은 뜻”이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본문의 글자나 단어, 숫자나 용어, 문법 속에 감추어진 의미들을 파악하는 일을 성서해석의 과제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어거스틴(354-407)을

거쳐 토마스아퀴나스(1225-1274)에 이르기까지, 아니 아퀴나스 이후에도 오랫동안 성경말씀에서 알레고리를 찾는 일에 깊은 관심 하였다.

주 후 16세기 종교개혁이 그런 흐름에 반기를 들 때까지 교회는 오랫동안 알레고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약속의 참 상속자가 되고,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이야기는 신약의 교회를 훈계하고 경고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 구약의

본문을 알레고리로 해석하여 그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도덕적 영적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알레고리의 유산을 비평적으로 추스려야 한다. 세련된 알레고리, 즉 본문의 문자적, 역사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는

알레고리는 오늘의 회중에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듣게 만드는 통로가 된다. 하지만 그 알레고리가 성서본문의 원 뜻을 크게

훼손하거나 파손해 버린다면, 또는 지나치게 자의적이어서 회중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사게 만든다면 그것은 오히려 설교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성서의 말씀을 알레고리로만 “푼다면” 성서는 자칫 이현령비현령이 되고 만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30-35)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자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돌보아 주면서 주막으로 데리고 가 주막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고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이야기에서 알레고리는 주막을 교회로, 데나리온 둘은 구약과 신약으로, 그가 돌아온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한다고 풀이하고 말았다.

알레고리의 원리는 “신앙의 유추”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주관적, 탈 문맥적, 탈 역사적으로 흐르면, 알레고리는 성서 본문의 원 뜻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본문의 역사적 상황이나 맥락을 살피지 않은 알레고리는 이런 일을 아주 많이 저지른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그 시작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누10:29)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이고, 그 결말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누가 10:36)는 예수의

반문인데도, 알레고리는 그런 본문상의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교회의 전통은 비록 소수의 의견이었지만 성서의 문자적, 문법적 해석을 추구했던 안디옥의 교부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본문의 문자적 해석은

성서 본문의 어법을 중요시하면서 그 본문의 문예적, 문법적, 문맥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같은 문자적 해석은 주후 16세기에 가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주후 17-18세기의 이른바 “개신교 스콜라학파”를 거치면서 교회의 성서해석으로 적극 수용되게 되었다. 해석자의 자의적 유추보다도

본문 저자가 한 말의 원 뜻을 갈무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주관적 해석보다는 본문의 문자적, 문법적, 어원적, 역사적 의미를 더 추구하게

된 것이다.


1) 기독론적 해석

알레고리가 해석의 방법론이라면, 기독론적 해석은 교회의 구약 해석을 이끌었던 해석의 내용이었다. 구약을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말씀에서

기독론적, 속죄론적 해석을 적극 추구하였다. 구약이 비록 유대교의 정경이었지만,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구약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

하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예수에 대한 최초의 증언은 예수의 죽음을 구약의 증언과 관련시켜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진술이다.

(고전15:3; 막9:12). 기독론적 해석은 구약의 가르침, 특히 예언을 메시야 예고라는 시작에서 적극 수용하였다.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사52:13-53:12)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예견하는 가르침이 된다. 예수가 박해자들 앞에서 침묵하거나, 고발을 당하거나(사53:53:12; 눅22:37),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묘사되는 것은(사53:7; 행8:32),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사53:7; 요1:29,36)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구약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기독교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하다. 유대교 랍비가 아닌 이상, 그리스도인은 구약을 읽고 해석하며

설교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을, 즉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구약을 설교할 때 기독론적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론적

감수성까지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모든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서 있어야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을 설교할 때 무조건 “구약의 말씀을 기독론적으로 꾸미려고” 덤벼서는 안된다. 그렇게 될 경우 구약에 등장하는 나무는 모조리 십자가가 되고,

붉은 색은 모두 그리스도의 보혈이 되며, 구약의 기름은 무조건 성령이 된다. 즉, 구약이 원래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말씀의 그 역사적, 본래적

의미는 가려지고 만다.

구약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이것은 신약의 중심이 그리스도인 것과는 크게 대조가 된다. 물론 구약에는 여러 다양한 주제들이 들어 있다. 여러 다양한

사상들이 주임 주제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구약의 구심점이다. 구약은 하나님 중심적인 책이다. 신약의 중심은 기독론,

 구약의 중심은 신론이다. 구약에는 기독론이 없다. 대신 하나님의 세상통치를 다룬다.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선포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통치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하는 초청장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역사서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이야기이다. 구약은 역사를 서술하면서도 그것을

드라마로 꾸며서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크신 행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 하나님의 구원사역, 하나님의 전개하시는 심판과 회복 등이 바로

구약 이야기의 중심이다.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구약 이야기의 무대에서는 밖으로

노출되지 안는다는 점이다.


2) 약속과 성취, 구속사

전통적으로 교회가 즐겨 사용한 구약 설교의 틀 가운데에는 “약속과 성취”라는 구속사적인 구도가 있다. 구약의 말씀을 약속으로, 신약의 말씀을

그 약속이 성취되는 현장으로 파악하였다. 약속과 성취는 해석학적인 그릇이다. 구속사는 그 그릇 안에 담긴 내용이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창12:1-3)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본다.(갈 3:1-14). 구약에 전개된 하나님의 역사가 “구속사”라는 내적인

흐름을 거쳐서 신약에서 그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신약에서 성취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 계획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그 정점에 이르는 구속사를 연출하고 있다. 성경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까지 단계적으로 진행하셨던 “구속사적 드라마의 전개”를 그 중심 뼈대로 삼고 있다.

약속과 성취의 틀 속에서 구약의 말씀을 구속사로 갈무리한 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연결된 말씀으로 본다는 정서를 대변한다. 처음에

교회는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정경으로 삼았다. 처음에 등장한 성서신학도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통합해서 해석하였다.  가블거(1753-1826년)에게

있어서 성서신학은 기독교 정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구약을 옛 것으로, 신약을 새 것으로 구분해서 구약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성서학자들도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구분된 반쪽 정경만을 자기들의 학문적 영역으로 거론하고 있다.

고대 교회 당시 마르시온이 저질렀던 잘못이 모습과 포장을 달리해서 오늘 우리 주위에서도 여전히 은연중에 저질러지고 있다. 성경을 회복하자!

성서신학을 회복하자! 목회자가 서는 설교 강단이야말로 성서신학이 회복되어야 할 자리이다.

구약을 설교하는 자들은 구약이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언약의 책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명칭이 결코 옛 약속과 새 약속

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파악되어서는 곤란하다. 구약은 결코 옛 약속이 아니다. 신약이 무조건 새 약속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새 언약이라는 불리는

신약도 시대적으로 말한다면 이미 2000년 전의 말씀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용어를 첫 번째 약속과 두 번째 약속이라는 맥락에서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구약을 설교할 때 구약의 본문 각각에서 뿜어 나오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단계

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고뇌와 연민, 희망과 위로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틀에 구약의 모든 가르침을 일발적으로

 적응시키려고 서둘지 말고, 각 시대마다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 본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진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 우리 상황 속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갈무리할 수 있어야 한다.


Ⅱ. 타입폴로지(typology)

구약성서는 사람의 말과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구약은 구약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은 신약과 함께 교회의 책(정경)

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본문 안에서”이뤄지고 있는, 또는 그 “본문 사이에서”이뤄지고

있는 해석상의 대화에 주목해왔다. 그것이 바로 “타입폴로지”, 곧 모형론(유형론)적 구약 해석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만 이런 본문 상의 대화가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해석학적인 대화가 생기기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의 증언 하나

하나는 아주 오FOT동안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여러 공간적인 상황을 통하면서, 상이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재해석 되어왔다. “본문과 본문 사이의

대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구약 본문 상호간의 해석학적 연결이야말로 구약을 설교하려는 자가 성서해석사에서 배우게 되는 창조적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모세 당시 광야를 유랑했던 세대는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예수의 시험은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준다. 광야에서 베푼

오병이어의 기적은 구약의 만나 이야기를 본 딴 이야기이다. 출애굽기의 만나는 성례전적 떡을 일깨워주는 모형론적 근거가 된다.(고전10:1-4). 초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만나 이야기에서 자기들의 과거를 회상했고, 메시야 잔치에 참여하는 자기들의 미래를 구상했다. 변화산상의 예수(마17:-8;

막9:2; 눅9:28-36) 이야기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모세 이야기(출24; 34:29)에 기초를 둔 기사이다. 신약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나

예수의 고난과 승리 등을 설명할 때 그 사건의 전형을 구약에서 찾았다. 구약의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해설하기 위한 모형론적 평행구로 이끌어

 들인 것이다. 그래서 불뱀에 물려 죽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놋뱀을 쳐다봄으로 다시 살게 된 사건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구원 사역의 모형으로 파악되었다(민 21:4; 요 3:14).

“타입폴로지,” 곧 모형론은 본문 뒤에 숨어 있는 뜻을 추론하는 알레고리와는 다르다. 모형론은 구약 본문이 전하는 사실을 그리스도 사건의

예표로 삼는 것만을 추적한다. 모형론적 해석은 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신앙 사건의 앞선 자취로 파악한다. 그런 점에서

모형론은 구약의 가르침을 신약의 진리와 연결해서 파악하려는 설교적인 노력이다. 우리가 모형론의 유산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석자가

 임의로 설정한 상징적 의미를 해석의 결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사실과 신약의 사실을, 구약의 사건과 신약의 사건을 구원의 모형과 신약의

원형을 서로 연결짓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형론은 구약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설교적 틀이 될 수 있다.

Ⅲ. 아날로지(analogy)

어떻게 구약의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들을 수 있을까? 그것은 설교를 통해서 성서 본문의 세계와 “연결될”

때 가능해진다. 설교는 “창조적인 아날로지”이다. 아날로지는 두 개의 사실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할 때 작용한다. 유추법으로 번역되는 아날로지는

두 개가 “똑같은 본성”을 지녔기에 비교하고 대조해본다. 아날로지는 서로 다른 것 사이의 비슷함뿐만 아니라 옛 것과 새 것도 상호 관련짓는다.

샌더스의 가르침을 따라서 아날로지를 사용한다면 아날로지는 더 이상 알레고리나 모형론에 머물지 않는다. 샌더스의 용어인 “역동적 아날로지”는

본문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 “역동적 아날로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설교에서 성서본문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결짓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두 세계 사이의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점을 존중하는 설교를 해야한다. 아날로지를 이룬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사물이 지닌 유사한 모습이나 속성을 비교해서 잘 알려진

것을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나 덜 알려진 것을 명쾌하게 밝혀내는 것을 나타낸다. 엄격히 말해서 아날로지는 두 개의 사물(개념, 실체 등)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유사점들에 기초하고 있다.”


말씀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의미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세대를 거쳐가면서 아브라함의 신앙 전승은 발전되기도

하고, 반전되기도 하며, 재해석되기도 한다. “역동적 아날로지”는 옛 시대와 오늘의 교회 시대로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며 견줄 것인가?

지금까지 알레고리나 “타입폴로지”는 텍스트의 내용을 유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샌더스가 여기에서 제안하는 “역동적 아날로지”는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를 유추의 과제로 삼으로려고 한다. 성서 본문의 컨텍스트(텍스트의 배경, 텍스트를 낳은 상황, 텍스트를 읽는 상황)와 회중의 컨텍스트

(오늘의 정황, 즉 설교를 듣는 자들이 처해 있는 세상)를 서로 이어보려고 한다. 본문의 컨텍스트와 설교자/회중의 컨텍스트를 잇자는 것이다. 이 때

텍스트의 해석(주석과 강해)이 남긴 해석학적 요철을 설교의 주제로 갈무리하는 것은 물론이다.

구약 설교에서 “역동적 아날로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요소는 성서 본문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이다. 상황의 유사성이 바로 “역동적 아날로지”의

핵심이다. 설교학자 패리스에 따르면 이런 아날로지의 대상은 크게 셋이다. 하나는 “텍스트 이면에 있는” 역사적 실체와 오늘의 세상을

비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텍스트 안에 들어 있는” 세상과 오늘의 세상을 비교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텍스트 앞에 있는” 자리를 오늘의

상황에서 포착하는 것이다. “텍스트 이면의 상황”이란 본문을 총체적으로 해석하면서 깨닫게 된 본문의 실체이다. “텍스트 앞에 있는 자리”란 텍스트를

읽는 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본문의 모습이다.

구약을 오늘의 말씀으로 설교할 때 눈여겨보아야 할 요소에는 본문의 상황만 있지 않다. 본문의 흐름, 즉 본문의 구조나 구성도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어떤

실체와 견주어 볼 수 있는 주요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약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하시는 지를 증언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