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와 글 공부

글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취몽인 2020. 7. 14. 13:23

글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프랑스 문화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저서 <카메리 루시다>에서 사진과 관련된 개념으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제시한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공통적으로 느끼는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정보이고, 길들여진 감정이며,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 같이 날아와 박히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데, 유독 나에게만 필(feel)이 꽂히는 그런 느낌이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 없는 예술은 이미 생명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글에도 스투디움과 푼크툼이 있다.

글에서 스투디움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메시지는 독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읽힐수록 좋다.

스투디움에 있어 각자 해석이 다르면 좋은 글이 아니다.

그러나 스투디움만 제공하는 글 역시 좋은 글이 아니다.

그런 글은 독자를 단순한 수용자에 머물게 한다.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똑똑한 구경꾼 정도에 만족하게 한다.

 

작가 고유의 스투디움이 있어 글만 보고도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건 고도의 경지다.

그만의 스타일, 다시 말해 그만의 스투디움, 그만의 클리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은 김훈, 안도현 등 몇 안 된다.

 

글의 본질은 푼크툼을 충족시키는데 있다.

글 한편을 읽고 자기만의 감정이나 느낌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다양한 푼크툼을 일으키는 글이 좋은 글이다.

나와 글 사이에 개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통로를 통해 개인적인 경험이 연상되면서 나만의 영감, 저마다의 직관, 특별한 통찰을 불러일으키는 글이 매력적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