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반 때 학점을 쉽게 딸 요량으로 교양과정의 심리학개론을 수강했었다. 그 무렵에는 취업을 앞둔 졸업반 학생들은 수업을 대충 빠지고 시험을 잘 못 봐도 학점을 주는 관례같은 것이 있었다. 나 역시 심리학개론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고 중간고사 날짜도 친구가 하루 전에 알려줘서 겨우 볼 수 있었다. 대충 논술 주제가 나오면 서푼 짜리 상식을 동원해 답안지를 채우면 될 것으로 생각했던 심리학 시험은 의외로 객관식과 괄호안에 단어 채우기 형식으로 출제 됐다. 낭패였다. 그냥 앞 뒤 문맥과 조사에 기대 적당한 단어를 우겨 넣고 나왔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30점 만점에 10점. 출석한 적 없는 출석 점수 0점. 제출한 적 없는 리포트 0점.
그러다 기말 시험을 앞두고 덜렁 대기업 취업이 확정되어 연수원 입소를 했다. 다시 낭패. 도저히 학점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낙제를 하면 졸업도 못하니 취업도 취소될 형편이었다.
연수를 들어가기 전에 교수를 찾아갔다. 머리 조아리고 선처를 빌었다. 교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400쪽 정도로 기억되는 심리학개론 교과서를 1/3로 요약 정리해서 제출하면 학점은 주겠다고 했다. 연수원에 교재를 가지고 들어갔다.
하지만 못했고 안했다. 대신 편지를 썼다. A4로 다섯장 정도 썼다. 잘 못 했고, 죄송하며 내 인생을 교수님의 처분에 맡긴다, 부디 젊은 인생 하나 구제해주시라. 뭐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연수를 마치고 출근을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학교로 갔다. 심리학 교수 연구실은 닫혀 있었다.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넣었다.
해가 바뀌자마자 나는 서울에서 신입사원 노릇을 시작했다. 학점이 나왔었나 보다. 그해 2월에 대학 졸업식에 참석해서 학사모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교수님과의 심리전을 잘 치룬 것 같다. 배수진을 치고 감정에 호소한 전술에 교수님이 넘어가 준 것이다. 안 넘어갈 수도 없었겠지만.
내게 심리학은 그런 학문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시절 생각만 했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 그간 나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혼돈하고 있었다. 그 구분의 기준을 세웠고 게슈탈트 이론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역사와 구조를 일관한 소득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무엇보다 그 시절의 무모함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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