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2021습작

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취몽인 2020. 6. 4. 10:11

나보다 먼저 떠나는 나를 보내는 일


내 손으로 어금니 하나를 또 뽑았습니다
구석에서 오래 흔들리던 놈
잠깐 아프게 버티더니 뿌리를 놓고 슬그머니 일어서더군요

지난 몇 년
열 몇 개의 이빨이 뽑히고 그 자리에 볼트가 박혔습니다
몇 몇의 나는 가고
녹슬지 않는 타인이 나를 지키는 셈입니다

어쩌다보니 어금니들은 내 손으로 다 뽑았어요
오래 아팠던 것들 진통제로 달래고
기다리다 버티다 제 발로 일어설 때만 헤어졌지요

어쨌든 헤어지면 아픔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지만
더듬어 보면 떠난 자리는 늘 깊더군요
오래 참아 늦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싶습니다

화단 귀퉁이 작약 몇 송이 저뭅니다
꽉 차게 빛나던 붉은 잎은 이즈러지고 발 아래 먼저 떠난 봄들 낭자하네요
다들 그렇게 떠나나 봅니다

제일 단단한 것들을 앞세워 보내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갑니다
먼저 떠난 것들은 어딘가에 모여 조금씩 떠나오는 나를 보겠죠
단단한 눈빛으로

그렇게
떠날 수 있는 것들은 먼저 떠나고
떠나지 못하는 것들은 남아 또 한 동안 또 아프겠지만
떠나는 일이란 결국

참는 일이라 생각하기로 합니다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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