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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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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세번째 시집.
앞의 두편 보다는 그나마 쉽게 읽히는, 다소 감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들이 담긴 시집.
여러 곳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詩들을 읽으며 든 군금 몇 가지.
'사랑은 몇 번의 경험만으로도 만 편의 시를 써낼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神을 집어 넣어도 의미가 대충 통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둘 다 모르기 때문인가?'
'시인은 이렇게 마음에 파도를 일으키는 사랑을 정말 해봤을까?'
전작인 '뒹구는 돌....'과는 분위기가 너무 다른 이 시집에서 시인은 숨고르기를 한 것일까?
자신에게서조차 너무 멀리 가버린 詩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느낌.
다시 붙들어 놓아야 또 더 멀리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사람이 죽고, 죽은 사람을 둘러 싸고 아귀다툼을 하는 시간이 가고 있다.
바이러스는 그런 인간들을 비웃으며 능글맞게 창궐하고...
세상이 더러운 詩 구덩이다.
장마 끄트머리, 바야흐르 여름은 이제 막 터져나올 것이다.
그런데 미리 여름의 끝을 봐버렸으니 어쩌누.
어느 책에서 시인이 한 말을 옮겨 본다.
"선이란 너의 악을 나의 악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문학은 위선보다 위악에 가까워야 한다. 사람은 본래 악이고 거짓투성임을 확인 한 후 그래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워지려는 자세이다. 진실할 수 없어도 진실해지려는 노력,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노력이 바로 아름다움이고. 그 아룸다움은 노력하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라고. 살기 위해 남의 살과 피를 먹을 수밖에 없고 결국 자신도 죽어 사라져야 하는 운명 앞에서 다른 생명의 고통에 어찌 편안할 수 있겠냐는게 시인의 마음이다. 그래서 시인 자신에게 시는 구원도 아니고 치유나 위로도 아니다. 오히려 아픈 곳을 더 아프게 드러내고 직시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 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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