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에세이

절름발이

취몽인 2020. 8. 4. 13:46
절름발이

나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다리가 짧고 가늘다. 그래서 걸을 때 전다. 요즘 말 많은 절름발이다. 사는 동안 꽤 불편했고 나이가 들면서 그 정도도 조금씩 더해가고 있다.
국민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의 놀림도 좀 받았다. 그 녀석들은 '절뚝발이'라고 불렀다. 그때 생각으론 내가 지들보다 공부를 잘해서 놀리나보다 했었다. 그 후로 오십 년 동안 다리 전다고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기형적인 다리를 보여주기 싫어 고등학교때까지 공중목욕탕을 가지 않았다는 것과 점멸 신호에 횡단보도를 잽싸게 달려 건너지 못한다는 정도가 불편함으로 남아있다.

절름발이, 절뚝발이 라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기는 한다. 그 또한 내 정체성의 일부인 탓이리라.

부조화, 부적격을 비유하는 말로 '절름발이'는 많이 쓰인다. 부족한, 비정상의 의미로도 쓰인다. 살면서 그런 비유를 접할 때 국민학교 시절 친구놈이 던졌던 놀림을 떠올린 적은 없다. 자연 고개를 돌릴 일도 없다. 내 정체성과 상관없는 말이니까.

장애는 불편하다. 기능적 불편함도 있고 심리적 불편함도 있다. 거기에 요즘엔 한 가지가 더해졌다. 페미를 위한 페미처럼 장애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가하는 장애의 선명화다. 모 어린 국회의원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상관도 없는 상황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들먹이는 일도 그런 차원의 폭력이다.
그 친구가 정말 하지장애인의 인권보호를 천명처럼 여기고 지나가는 한 마디 修辭에 방어의 칼날을 들이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강박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경우 '절름발이'는 더 속상하다. 나의 불편함을 너를 포장하는 무기로 쓰지마라. 그 젊은 정치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장애인은 스스로 장애인임을 모르고 살 때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장애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물론 하루하루 큰 고통에 직면하고 있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사회나 이웃이 좀 불편한 이들을 배려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더 큰 배려는 선을 긋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자연스러운 삶의 순간 속에서 '너는 부족한 자이다.'라는 각성을 굳이 하게되는 건 불편하다.

초짜 정치인 당신이 튀기 위해서 장애를 교활하게 이용하지 마시라. 절름발이들은 당신같은 애송이들보다 훨씬 강한 존재들이다.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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