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취몽인 2020. 9. 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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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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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생 돼지띠 시인 3인 중 한 사람. 최승자.

고통의 언어로 가슴을 학대하던 詩의 시절을 지나
무심하게 시간의 하늘을 나는 작은 구름의 시절로 떠있는 시집이란 느낌이 들었다.

시집에는 시간과 세월과 잿빛이 도처에 흐른다.
시인은 그 초시간의 앞자락과 끄트머리를 오가며 흐른다. 지난 날의 고통마저 이제는 다 낡았고 무언가를 노려보는 일 또한 의미를 잃은듯 보인다.

10년전에 나온 시집이니. 시인은 그때 딱 내 나이였고 이제는 칠순을 바라보고 있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3인 중 황지우는 詩를 작파중이고, 이성복은 아직도 실험중. 최승자는 아프다고 한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시간의 의미들을 씻고 있으리라. 그래서 시도 인생도 투명해지는 중이 아닐까싶다.

쓸쓸해서 머나먼 57년을 지나 시인은 이제 잿빛 구름이 투명해지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시간도 멈추고 온세상이 말갛게 비치는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나 혼자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