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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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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참 좋아했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책.
시인의 눈에 밟히는 詩는 이제 내 눈에도 비칠 것인가? 기대하며 읽었다.
그간 세월을 공으로만 먹진 않았는지 조금은 염치가 생겼나보다. 詩 한 편 한 편을 넘겨가기가 미안하다.
천천히 읽고, 다시 읽고, 다 읽고도 제자리에 꽂아두기가 망설여진다. 여전히 어려운 詩도 있으나 이젠 그저 좋은 詩가 대부분이다. 이런 마음이라도 쌓였으니 그게 염치라 생각한다.
위의 이문재시인의 詩처럼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죄는 여전하지만 그러면 할 수 없지 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리 부끄럽진 않다. 길 너머는 또 언제든 가게 될 것이고..
-2001.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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