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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엄연히 현실에 동원돼 있으나
정체는 바닥과 한 몸이라 드러나지 않는다
파먹히고 난자당하지만 입이 없다
역할은 분명하지만 진술이 없다
자르는 쪽도 잘리는 쪽도 아니다
때리는 쪽도 짓이겨지는 쪽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둘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둘 사이 행위를 모두 받아안는다
핏물이 튀고 살이 발라진 다음에
목적을 떠난 잉여의 힘을 덥석 문다
튕겨나가는 여분의 흉기를 경계 안쪽으로 끌어안는다
가축의 범위를 정하고
법이 정한 도살과 착취의 면허를 부여하고
핏물을 뒤집어쓰고 칼집으로 날을 저지하는 곳에
야생의 누출을 저지하는
광란에 윤곽을 부여하는
파멸 직전 무고한 죽음의 희생제의가 치러지고
그리하여 겨우
세계가 유지되는 그 바닥에
정체가 명명되지 않기에 허용되는 아래쪽에
수많은 칼집을 받아안아야 하는 곳에
-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2020.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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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온 시집이 헌책방에 새책처럼 놓였다.
누가 사고 또 부지런히 팔았을까?
노동의 시는, 자유의 시는 그런 처지인가?
아니면 소문이 사실인 탓인가?
소문
땅 파는 소리를 낸다는
시인의 시집을 옆구리에 차고
남쪽 여행을 다녀왔다
밤늦도록
무뚝뚝한 술을 마시고
겨우 일어난 아침에 누가 말했다
하나 남은 깃발마저 치워버릴 수 없어
허물을 감추고 있다고
돌아오는 길
다시 펼친 시집에는 금이 가 있었다
이틀 사이에
시는 붉게 녹슬고 말았다
함성 뒤에 감춰진 비명이 들렸다
더 이상 땅을 팔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마저 읽었다
시는 시니까
쇳조각 하나 툭 떨어졌다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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