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취몽인 2020. 11. 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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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말을 꼬불려서 곧은 문장을 비틀어서
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참신하고 어쩌고 떠드는 서울의 친구야
무등산에 틀어박힌 나 먼저
어틀란틱誌나 포에트리誌를 떠들어 봐도
몇 년간을 눈알을 부라리고 찾아봐도
네 놈의 심장을 싸늘하게 감싸는
그럴 듯한 싯귀는 없을 거다
네 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찢어서 죽인 어제는 없을 거다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부딪치던 소리는 없을 거다
동시에 핏줄기를 이끌고 떨어져 나가던 절벽은 없을 거다
그런데 너는 무슨 속셈으로 페이지를 넘기느냐
노랑내가 질질 풍기는 흰둥이의 정신을 넘기느냐
개자식 같은 놈아
뉴요크나 시카고에서 뽑아낸 싯귀를
눈깜짝할 새에 뒤집으려고 덤비는 놈아
어디 멋들어지게 둔갑시킬 싯귀는 없나 하고
초조히 서두르는 엉큼한 놈아
네 놈이 노려야 할 혁신적이고 어쩌고 하는 시는
네 놈이 걷어차버린 애인에게 있고
밤중에 떨어진 꽃잎 밑에 있고
이장네 집에서 통닭을 삼키는 면서기의 혓바닥에 있고
어금니로 질근질근 보리밥을 씹어대는
시골 할머니의 흠없는 마음 속에 있고
전봉준이가 육자배기를 부르며 돌아오던
진달래꽃 산 굽이에 희부옇게 있고
네 놈의 뒤통수에 패인 흉터에 있고
아침마다 쓸어내는 방 먼지에 있을 것이다
Auden이 어느 시대 녀석인데
제임스 메릴이 며칠을 두고 커피 마시며 빚었는데
그 자들의 시를 감쪽같이 비틀고 엎어서
좋지? 이 정도면 캐릭티컬하지?
뻐기며 소리치는 병신 새끼야
나의 시는 네 놈을 비웃는 곳에서 엉뚱한 힘을 얻는다
네 놈의 머리와 뱃속을 채운 속임수에서
나의 시계, 조국을 만나고
김소월이와 이상이 싸우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네 놈이 떠나버린 밭 귀퉁이에
홀로 남아서 시를 쓴다
글안족이 뭉개고 일본의 어스름이 짓누르고
간밤의 도적놈이 살금살금 기어가던 흙에
배를 깔고서
쌀밥보다 미끈한 시를 쓴다
네 놈이 보듯이 이런 詩를 쓴다

-1969. 詩人


-김준태 1977. 창비

통쾌하면서도 약간 슬픈 시론이다.^^
고향과 노동과 자유, 땅을 지키는 지방 시인.
그러나 우뚝한 시인의 1977년판 일갈이다.


아는 형님이 얼마전 오래된 시집을 내다 버리셨다는데 나는 요즘 오래된 시집을 꾸역꾸역 새로 사서 읽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새 시집 살 돈이 아까워 헌 시집을 사서 읽는 것이다. 굳이 하나 더 이유를 찾자면 새 시집들 상당수는 내게 너무 어렵다는 것 정도.
최신의 시 경향을 알고 넘어서고자 노력하는 것이 시인의 자세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지만 애시당초 나라는 자는 대단한 시인이 될 싹수가 없으니 그런 노력은 하고싶지 않다. 그저 시를 읽어 마음이 좋으면 그만.

오래 된, 그래 봐야 한 이삼십 년 전 정도지만, 시들은어쨌든 편하다. 내 젊은 날들이, 시절이, 역사가 그곳에 있다. 그곳에는 또 그 무렵 시인들의 날카롭고 깊은 슬픔들이 있다. 세월이 지났다고 그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행이나 최신 스타일이 꼭 그 시들보다 가치있다 말할 수도 없다.
역사가 돼가고 있는 시인들의 젊은 시절을 시로 만나는 재미도 크다. 현재의 모습과 현재의 시적 목소리를 익히 알고 있는 시인들의 그때 모습과 목소리는 흥미롭다. 대부분은 모서리가 닳아 어느 정도 순해진 시인과 시들. 그 동글동글한 자갈들이 험상궂은 주먹돌이었던 시절을 읽는 일. 각자의 서사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형님이 내다버린 그 묵은 시집들을 챙기지 못한 일이 내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