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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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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다니다 오면 그날 밤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에는
깊은 곳에서 몸살이 찾아온다
너무 많은 길을 욱여넣은 탓일까
빠른 속도로 벌레의 눈빛을
꽃잎의 색깔을
산모롱이에 허리가 휜 냇물을
버리고 온 탓일까
처리해야 할 사무와 변제해야 할 부채와
이루어야 할 약속이 길의 심장을
대체한 탓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속도에 부숴지고
효율과 이윤에 몸을 내어주면, 몸이 먼저
그것을 아는 것이다
높이 뜬 구름도
석양에 가난해지는 강물도
누추한 슬픔이 되는 것이다
죽음도 작아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앓아야만
이 세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버려져야만
몸에 새겨진 굴욕이, 숨을 내쉰다
아픔은 그래서 다른 종으로 넘어가는 끓는 점 같은 것
뼈마디 사이로 불어오는 신의 숨결 같은 것
때로는 아픈 게 큰 싸움이 된다
- 황규관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2019.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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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나 비유, 리듬, 말투, 낯설게 하기 등 익숙하지만 쉽지 않은, 詩라는 집을 짓는 재료 또는 기술 같은 것들. 굳이 그것들에 기대지 않아도 훌륭한 詩는 얼마든지 쓰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시집을 읽으며 알았다.
오래 묵은 성찰이나 통찰 같은 것들이 운문의 형식에 담길 때 화장기는 다소 거칠 수 있지만 오래 울리는 느낌이나 어딘 가를 되집어 보는 마음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시인이 소중히 생각하는 어떤 세계관에 대한 선입이 조금 깔려있을 때는 그 굳은 주관에 존경심도 들기 마련이다.
詩는 봄날의 난분분한 꽃잎이나 가을날 서늘한 눈빛의 바람이어서 좋기도 하지만 뒷산 언덕에 묵묵히 그늘을 드리우는 검은 떡갈나무여도 좋은 것이다.
시인이 멈추지 않고 벌이는 싸움을 뒤에서, 곁에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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