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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털기 전
.
누군가 말했다.
'머리칼에 먹칠을 핻ᆢ
사흘 후면 흰 터럭 다시 정수리를 뒤덮는 나이에
여직 책들을 들뜨게 하는가,
거북해하는 사전 들치며?
이제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땐데.'
밤중에 깨어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미래를 향해 책을 읽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빨리 비워지고 헐거워진다.
날리는 꽃잎들의 헐거움,
어떻게 세상을 외우고 가겠는가?
나는 익힌 것을 낯설게 하려고 책을 읽는다.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 지면
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이다.'
우주 뒤편은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일 것이다.
노란 꽃다지 땅바닥을 기어
숨은 곳까지 따라오던 공간일 것이다.
노곤한 봄날 술래잡기하다가
따라오지 말라고 꽃다지에게 손짓하며 졸다
문득 깨어 대체 예가 어디지? 두리번 거릴 때
금칠로 빛나는 세상에 아이들이 모이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 황동규
- 문태준 엮음. <동행>2008. 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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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스르르 풀리게 하는 詩들이 많다.
그중에 황동규의 詩를 고르게 되는 건 아마도 책과 우주 뒤편과 어머니 다음 나를 기다리는 순서 탓이지싶다.
나는 책을 왜 읽고 있나? 미래의 나를 위해서? 지금의 나를 위해서? 그저 강박적으로? 시인처럼 묵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책을 읽을 날이 내게도 올까? 그때 이 詩를 떠올릴 수 있을까? 시인은 벌써 우주 뒤편으로 떠났을 그 때가.
어머니도 햇살 화사하게 녹아내리는 장독대 채송화 옆에서 문득 잠깨어 여기가 참 좋구나 하셨으면 좋겠다. 그곳이 천국이건, 우주 뒤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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