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취몽인 2020. 12. 2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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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


알고보니 그곳은 유곽이었다
대낮이었으므로 적적했다
서둘러 빠져나오다 뒤돌아보고
어쩌다 나는 무엇하러 이곳까지 왔던가
다시 뒤돌아보고
일어선 돌부리에 걸려 휘청했다
잠시 얼굴도 닫고
근처 구멍가게 평상 모퉁이에 앉았다
나는 지금 어느 후미진 生을 빠져나온 듯
바카스라도 한 병 마실까?

발치에 다가오는 그림자 한 자락
평상 뒤에 오동나무 한 주 서 있다
누군가 맡긴 수많은 심장들을 펄럭이며 서서
내 심장을 보여달란다
벌써 무릎까지 올라온 심장 그림자 한 자락

낯설고 눈부신 노래를 눈으로 불러
심장을 주고 일어서니

내내 내 一生은 그
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
가련히 아무데서고 서 있는 거였다.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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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어딘가에서 읽었던 시집이라도 굳이 새로 사서 다시 읽고 가지고 싶은 시집들이 있다. 다 읽고 덮어도 곧 다시 꺼내 읽고싶은 시들이 있어 그렇다. 내겐 황동규, 문인수, 유홍준, 문태준, 장석남 같은 시인들이 그렇다.

오래전에 읽고 시집은 술김에 누군가에게 줘버린(내 술버릇 중에는 읽던 책을 줘버리는 짓이 있다. 술 깨면 후회막급한, 다 읽고나 주든지.) 시집. 그리고 년전에 도서관에서 다시 읽었던 시집을 알라딘을 뒤져서 다시 사 읽었다. 20년전 시집을.

장석남의 시들은 가슴으로 읽힌다. 굳이 뭘 말하지 않는다. 쓸쓸하거나 멀뚱한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마음들이 있다. 읽고나면 어떤 희미한 그림자나 연기 한 자락, 저녁하늘의 시무룩한 구름같은 것들이 마음을 뒤척이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런 웅얼거림, 얼비침, 스며나옴 같은 詩들이 참 좋고 늘 흉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시인의 눈과 가슴으로 이어진 오래된 마을 고샅 같은 길이 내겐 없는 탓이다. 그래도 괜찮다. 시인은 한결 같이 마음을 그려내고 있으니 뒤에서 따라가며 완상하거나 부러워하는 일도 나름 지복이라 생각한다. 시인의 존재 이유라 생각하고나는 어렵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