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나무 / 김용택

취몽인 2021. 1. 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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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구름처럼 심심하게 하루가
또 간다
아득하다
이따금 바람이 풀잎들을 건들고 지나가지만
그냥 바람이다

유리창에 턱을 괴고 앉아
밖을 본다. 산, 구름, 하늘, 호수, 나무
운동장 끝에서 창우와 다희가 이마를 마주대고 흙장난을 하고 있다

호수에 물이 저렇게 가득한데
세상에, 세상이
이렇게 무의미하다니.


-김용택 <나무>. 2002. 창비시선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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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시인은 섬진강댐 근처 분교에서 아이들 몇을 가르치고 있었나보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혼자, 아니 늙은 어머니랑 살았나보다. 이미 오래 詩를 써왔을 텐데 어쩌면 슬럼프였는지 모르겠다.
詩들은 심드렁하다. 섬진강과 아이들, 산그림자, 미루나무는 변함없지만 시인은 기운이 없다. 잘 모르지만 詩탓이라 짐작해 본다.
시집엔 달랑 스물 다섯편의 詩만 실렸다. 긴 詩가 많은 탓이다. 그야말로 산문같은 詩들은 시인에게서 쉬 볼 수 없는 詩들이다. 어떤 심정이 이 긴 이야기들을 하게 했을까?
20년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 그리고 섬진강변의 詩앞에 다시 섰던 시인. 그 길고 불안했던 詩의 삶이 긴 이야기를 풀었던 건 아닐까? 그 시절을 지나,댐을 넘은 섬진강이 다시 그 느그러운 흐름을 회복하듯 지금의 편안한 주름을 만든 건 아닐까?

오래된 시집 한 권을 읽으며 한 시인의 삶을 내 멋대로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