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에세이

밑천

취몽인 2021. 7. 2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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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천


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광고과로 발령을 받은 이래 근 30여 년을 광고밥을 먹고 살았습니다. 누구처럼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있는 대단히 성공한 캠페인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대략 1,000여 개 이상의 브랜드 광고를 기획하고, 만들고 매체에 실었습니다.
정신없이 일하던 어느 순간 마흔이 넘었고 그 바닥에서는 퇴물이 됐습니다. 그래도 배운 도둑질이 광고인지라 그 언저리에서 고군분투하며 한 십년 더 버텼는데 그 또한 한계가 있더군요.

광고바닥에서 A.E (광고기획자)들이 농담처럼 자조적으로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평생 남의 물건을 팔아주지만 막상 제 장사를 할 때가 되면 아무것도 제대로 못해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를 대긴 했지만 광고가 실전 마케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커뮤니케이션 분야라 야전 마케팅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이 대체로 공감하는 이유였습니다.

보청기 사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간 내가 해왔던 광고마케팅 경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생각해본 적 있었습니다. 솔직히 위의 이유로 스스로도 미심쩍었습니다. 그래도 기댈 곳은 거기 밖에 없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시장에 타겟은 한정되어있고 제품은 고관여에 고가였습니다. 볼륨마케팅을 할 수도 없고 철저한 타겟 마케팅에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로컬마케팅 시장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미디어 시장이 매스에서 바이럴 등 다채널 타겟 비히클이 많아진 환경으로 바뀌었고 타겟들의 미디어 접촉 태도(personal media network)도 바뀐 탓에 좁은 지역, 작은 시장에서의 마케팅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 생각됐습니다.

안양에 보청기 사무실을 연지 이제 보름 남짓. 어느새 열심히 광고를 만들고 여기저기 메시지를 보내는 광고쟁이 보청기 원장이 되어 있는 저를 봅니다. 피식 웃음이 나오더군요. 밑천이 빤하니 바닥을 긁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렇게 밑바닥 광고마케팅을 직접 해본지는 특히 오래됐습니다. 대략 차장 직급을 달았을 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후론 주로 관리나 영업, 프리젠테이션 따위를 했으니 적어도 20년만에 해보는 실전 실무입니다. 옛날 생각이 자꾸 나더군요.
어쨌든 내 사업을 꾸려가기 위해 내 밑천을 알뜰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SNS 친구들에게 노이즈를 일으켜 죄송하기도 하지만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광고대행사 A.E 출신도 제 사업 마케팅 잘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건 사치고요. ㅎㅎ. 잘 살아남아 보겠습니다. 자본은 뻔하지만 광고 밑천은 어디 가지 않으니 사실은 든든한 빽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화이팅, 전직 광고쟁이 현직 굿모닝보청기만안센터 원장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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