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에세이

덕분

취몽인 2021. 10. 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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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

한때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남에겐 없는 장애도 있고,
잘 사는 부모를 만나지도 못해
늘 궁핍하게 사는 게 싫었다.

사회에 나와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을 다닐 때에도 그 불행의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고
때문에 적지 않은 방황을 하느라 젊은 날의 많은 기회들을 탕진했었다.

내 마음 속의 불행은 나만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에게도 불행의 그늘을 드리웠었다.

적잖은 세월이 흘러 이 자리에 섰다.

이제 나는 더이상 불행하지 않다. 다리는 옛날보다 더 불편하고, 여전히 그리 잘 살지는 못하지만 행복하다.

이 반전은 십년 전쯤의 바닥에서 시작됐다.

잘 나가던 광고대행사 이사에서 보험영업사원으로 추락했을 때, 그 모멸의 시간에서 나를 건져준 건 친구들이었다.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심지어 처음 보기도 했던 친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도움을 줬다. 물론 내 노력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친구들의 힘이었다.

그렇게 십 년. 내 곁에는 친구들이라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고 나는 그 숲속에서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친구는 또래 만이 아니다.
십 년 위 아래로 동생과 형도 친구였다.

일주일에 딱 하루 쉬는 일요일 오전,
늦잠을 자는데 전화가 왔다.

오늘도 출근하느냐?

쉬는데.

얼굴 함 보러 사무실 들를까 해서.

주섬주섬 옷입고 사무실로 나왔다.
한참 동안 옛날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는 굳이 제가 밦값을 내 점심을 사고 아내 주라고 선물을 놓고 갔다.

십년 전, 내게 마지막으로 광고대행사 이사 자리를 맡겼던, 보험쟁이 됐을 때 빨리 때리치라 했던, 아직도 뭐 도와줄거 없냐고 묻는 나보다 십년 어린 친구다.

내 행복의 뿌리 하나가 다녀간 것이다.

2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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