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
2007.8.13
집 앞 조그마한 마당에 연하여 앞 집과의 경계를 짓는 담장이 있다.
이사 올 적부터 자리잡은 앵두나무가 그 사이에 당그마니 자리잡고 있는데 작년까지만해도
그 붉은 열매를 잎보다 많이 달더니 올 봄에는 잎조차 피우지 못한 채 메마른 몸뚱이를
고스란히 허공에 걸어 놓고 있다. 워낙 콘크리트 슬라브 위로 흙을 채우고 그 위로 심은 녀석이니까
아마 왠만큼 자란 제 몸을 곧추세우기에는 땅이 너무 부실했는 지도 모르겠다.
어�던 녀석은 그렇게 말라 죽은 채 쓸쓸하게 앞 마당을 지키고 있고 그 그루터기 아래로
녀석의 자식들이 새순을 앞다투어 내더니 지금은 제법 내 키만큼 자라 엉성 무성하다.
떠난 녀석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그 녀석들을 애지중지 돌보고 있다.
아직 수형을 잡기에는 몇년은 걸리겠지만 우선 녀석들이 곧게 자랄 수 있도록 그 중 튼실하게
가지를 뻗은 몇 놈을 죽은 제 어미 몸통과 묶어 다잡아 두는 일을 어제 오후에 했다.
금년에는 그렇게 자라도록 두고 내년 봄 새 잎이 나기 전에 다시 건강한 몇 녀석만 남기고
가지를 쳐줄 요량이다. 어미가 죽어서인지 그렇게 솎아 내는 것도 녀석들의 생명을 앗는 일이라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죽을 수는 없는 일,
제대로 살 녀석이라도 살려야 하는게 자연의 도리이지 싶다.
여기에도 진리가 있다.
인정하기 싫은 슬픈 진리.
장마가 지나고 여름 휴가를 다녀왔더니 앵두나무 옆 담벼락이 야단이 아니다.
매년 담 아래에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모종을 심어 여름 나는 동안 호박잎도 쪄 먹고 풋고추도 따먹고
했었는데 금년은 어쩌나 보니 시기를 놓쳐 버렸다. 그런데 담너머 집에서 호박을 심었나 보다.
호박 덩굴이라는 놈이 제 집 남의 집 가리는 법은 없는지라 담을 넘어 우리집 마당까지 그 덩굴 손을 마구 뻗쳐 오고 있다. 담에는 원래 담쟁이가 몇년 전부터 자리를 잡고 제법 운치를 풍겨주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년 봄에는 우리집 벽 아래에도 담쟁이를 좀 심어서 집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덩굴 구경을 좀 할 요량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 담쟁이 덩굴 위로 호박 덩굴이 마치 점령군 처럼 위세를 떨치며 뒤덮어
버렸다. 담쟁이 뿐만 아니라 어디서 싹을 틔었는지 포도 덩굴도 기웃 기웃 머리를 내밀고 잇어 운이
좋으면 늦여름엔 공짜 포도 맛 좀 보려나 하고 있었는데 그놈 또한 거칠거칠한 호박 덩굴 위세에
뒤 덮혀 어째 기운 없이 겨우 고개만 비집고 하늘을 향해 비칠비칠 뻗어있는 꼴이 포도 맛 보기는
틀려버린 느낌이다. 거기다가 담아래에는 이름 모를(나팔꽃 종류인 듯 한데..) 덩굴이 그 와중에 바닥을 납작 기며 호박 덩굴 위세 몰래 제 영역을 펼쳐가고 있기도 하다.
그 좁은 담장 하나에 터줏대감 담쟁이, 호기롭게 생명을 펼치던 포도, 몰래 기는 이름 모를 녀석,
그 위를 마치 도포하듯이 휘젓는 호박 덩굴까지 네 종류의 덩굴이 뒤엉켜 살고 있는 셈이다.
지금 그 담의 주인은 분명 호박 덩굴로 보인다. 열매하나 얻으먹으려는 내 탐심도 힘을 보태 녀석의
영역 확장을 은근 슬쩍 돕기도 한다. 옆집 담 아래도 덩굴을 뻗어 내 통제를 벗어날 기미가 보이면
잽싸게 걷어 올려 우리 집 난간 쪽으로 방향을 돌려 놓기도 하고 마당 바닥으로 어줍잖게 팔을 뻗은 놈은
추스려 제자리인 담장으로 되돌려 놓기도 한다.
호박꽃은 주로 아침 나절에 폈다 오후에는 그 꽃잎을 닫는다. 주로 많은 것이 수꽃들이고 호박이 달리는
암꽃은 가끔 한송이씩 필 뿐이다. 그리고 호박의 지혜 하나. 근친 교배(식물에 이른 용어를 쓰는 게 좀
어색하긴 하지만..)를 피하기 위해 한 포기의 호박줄기에서 피는 암꽃과 수꽃은 꽃잎을 여는 시간이
서로 다르다. 수꽃이 먼저 펴서 벌들을 잔뜩 모은 후 그 잎을 오므린 후에야 암꽃이 비로소 꽃잎을 연다.
그러면 다른 어딘가에 있을 호박 수꽃에서 꽃가루를 잔뜩 묻힌 벌들이 그 암꽃으로 날아들어 수분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줄기에서 난 암꽃과 수꽃의 꽃가루 받이를 미연에 방지해서 우성 유전자를
결합해 더 좋은 2세를 생산해내는(그래봐야 호박이지만..) 절묘한 메카니즘..
누가 이런 걸 가르쳐 줬을까?
지금 내 눈에는 스텐레스 난간 쪽으로 애기 주먹만한 크기로 달린 호박 하나가 관리 대상으로 들어와
있다. 우리가 작년에 심은 호박 품종은 동그란 녀석이었는데 지금 달린 모양을 보니 이녀석은 여름에
밥상에 잘 오르는 길죽한 모양인듯 하다. 씨방이 자라 호박 모양이 부풀기 시작하면 녀석을 맺게해 준
꽃은 볼품없이 시들어 할머니 젖가슴 처럼 매달려 있다 떨어진다. 꼭 열매를 맺은 암꽃 뿐만 아니라
호박꽃이 떨러진 모양은 참 처연하다. 바람에 떨어진 수꽃들은 하루만 지나면 마치 짓밟힌 듯 처첨한
모습으로 시들기 전에 썩어 간다. 다른 꽃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아마 수분도 많고 화려한 만큼
영양도 많아 잘 썩는지도 모르겠다. 비단 꽃뿐만 아니라 덩굴 줄기는 왜 그리도 쉽게 꺽이고 잎은 왜
또 그리 잘 찢어지고 시들어가는지.. 단숨에 담벼락을 지배하는 왕성한 생명력 이면에서 단단치 못한
과체중 어린이들의 모습을 느끼곤 한다.
반면에 포도 넝쿨(이상하게 포도에게는 덩굴보다 넝쿨이 어울리는 것 같다. 이상한 취향인가?)은
나무의 기상이 있다. 하긴 호박, 나팔 꽃 따위는 일년생 식물이고 포도는 덩굴 식물이지만 엄연히
한 그루의 나무다. 족보와 뼈대가 다른 것이다.
지금은 잎 넓은, 그래서 햇빛을 과점하며 단시간내에 담벼락을 점령한 호박 덩굴의 위세에 가려 있지만
몇 개의 호박을 매달고는, 그래서 무성함의 역할을 그예 끝내고는 그 만큼 빠른 속도로 덩굴이 쇠잔해져
갈 무렵이 되면 뼈대있는 이 넝쿨 나무는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호박 덩굴과 포도 넝쿨의 어색한 동거를 바라보며 계급 사회가 떠오른 것은 그야말로 느닷없는 일이다. 넓게 펼친 다수의 투박한 중산층과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한 윤기 나는 엘리트의 모습.
세대를 바꿔가며 세상을 뒤덮지만 몇몇 기억나지 않는 성과 만을 남기고 부스스하게 사라져가는 호박
덩굴 같은 중간 계급들, 우리들..
뿌리 깊은 생명력과 단단함으로 무장한 수단의 가지로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빛나는 포도송이를 낳을
넝쿨같은 주류들, 그들...
하지만 그들도 열매를 맺고 나면 몸통만 남기고 팔다리가 잘려 나갈 것이다. 몸통은 남기고? 남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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