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가는 길
2008. 1. 10
빠르게 미끌어져 온 KTX를 내려 동대구역에서 갈아 탄 포항행 무궁화호 열차
덜컹거림만큼이나 풍경은 갑자기 느리게 흔들리고 시간은 뒤로 흐르는 듯 하다
세월에 밀려나지 않으려 억척스럽게 수다를 쏟는 할머니들의 거센 사투리가
매케한 냄새 가득한 밀려난 완행열차 무궁화호 객실에 푸석푸석 뛰어 다니고
귀대하는 해병대원 밀려오는 졸음은 군복 옷깃에 안타깝게 목 움츠려 까물하다
잽싸게 도착하고 느리게 떠나는 고향은 나른한 속도에 실려 주춤주춤 물러선다
덜컹 덜커엉 어설프게 흔들리는 닳은 레일의 습관적인 리듬은 묵은 기억을 들추고
풀무질 하듯 머릿 속은 뜬금없이 솟는 도둑질과 거짓말, 그리고 패악들로 섬뜩하다
앞뒤 없는 욕심으로 상처를 남겼던 어릴적 여자들과 빤히 뜬 눈으로 저지른 배반들
차창 밖으로 떠나가는 내 고향은 그렇게 원귀들처럼 덜컹 덜커엉 나를 흔들어 댔다
하양 영천 낯익은 지명과 낯익은 풍경들이 오히려 메마른 얼굴로 낯설게 바라본다
핸드폰에 암호처럼 저장해 둔 한 여자 아이가 살고 있는 곳 경주는 나의 음모이다
작은 강을 넘어 몇몇 골목 길을 돌아가면 그 아이는 빈 길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것이고
언젠가처럼 불쑥 들어서면 놀란 표정 속에 숨은 당혹 그리고 상처같은 기억을 일으켜
낯선 커피 한잔으로 나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곳은 이미 날 선 경계가 가득한 곳
겨울 한 낮의 풍경은 늙은 강처럼 조용히 흐른다 전선 위엔 이름 모를 새떼 나란하고
느닷없는 바람이 불었는지 바짝 마른 논두렁에선 까마귀떼 장막처럼 솟아 오른다
어딘 가를 향해 가는 길에 이렇게 많은 동행이 웅크리고 있음을 지금까진 몰랐었다
어쩌면 미처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들은 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깡마른 가지에 매달려 살얼음 낀 여울에 상처 깊게 누워 내 기억이 그들을 깨울 때까지
나는 지금 포항으로 가고 있다 예정된 만남이 기다리고 있고 녹슨 바다가 엎드린 곳
하지만 저 산 너머 바다 발치에 누운 일상들을 만나기도 전에 미리 떠날 일을 생각한다
완행열차 덜컹 거림에 우우 깨어 일어난 나의 기억들이 다시 떠나는 나를 바라 볼 시간
이번에는 쾡한 표정의 그들과 화해나 속죄의 인사를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잠을 깨운 자에게 다시 잠을 재워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들을 위로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돌아 가는 시간이 되면 완행열차는 느린 뒷걸음으로 까마귀떼를 논두렁으로 내리고
경주의 음모를 다시 켜켜한 시간의 뒤로 숨길 것이고 얼음짱과 마른 가지에 망각을 걸 것이다
영천과 하양은 낯선 이름과 풍경으로 메마른 겨울에 드러 눕고 덜컹 동대구에 닿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억센 사투리는 올라 버린 완행열차 차삯에 분통를 터트리며 해병대원을 깨우고
비겁한 나는 훌쩍 KTX에 올라탄 뒤 시속 300킬로로 기억을 잘라내고 잽싸게 탈출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