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하루 에세이

惡性

취몽인 2008. 4. 15. 17:01

2008. 4. 15 (화)

 

 낯 기온이 22도라고 한다. 저녁에는 아직 쌀쌀하지만 낯엔 덥다. 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1990년, 지금부터 약 18년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어깨 힘주고 살던 광고주 생활을 파산과 함께 접고 낯선 광고대행사 생활을 처음 시작한 해였다.

대기업에서 지내는 습관이나 복장 등으로 인해 공무원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광고대행사 과장 시절.

내 첫 광고주는 한국화장품이었다. 화장품 광고주, 예나 지금이나 만만찮은 광고주다.

컨택 라인은 대구 계명대 디자인학과 출신의 K모 계장. 외모만큼이나 깐깐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현수막 시안을 제출하는 날이었다. 벌써 17번째 재시안.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시 해오시라. 그것이 16번 시안 보드를 들고 돌아서야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날도 시안을 내밀자 K는 대뜸 X발 이 따위도 시안이라고 해온거야. 하고 시안을 집어 던진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나도 x발 잘난 네가 다 해먹어라. 시안을 찢어버리고 그곳을 박차 나왔다. 

엘리베이터 홀에선 공교롭게도 내가 얼마전까지 근무하던 한일그룹 사옥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자 한 직원이 뛰쳐 나왔다.

나를 보더니 뭔 일입니까? AE 바꿔 달라고 하네요.. 짤린 것이다.

물론 사정을 짐작하는 회사에선 담당 업무를 바꿔주고 그일에 대해 뭐라 문책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만난 첫번째 악성 광고주였다.

 

 2008년 4월, 현재

직원들이 야단이 났다. 스티커 하나 만드는데 하루종일 수정을 하는 광고주,

스케줄의 부당함을 말하면 싫음 관두면 될것 아니냐 라는 광고주.

악성도 이런 악성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냐고 하소연들이다.

해줄 말이 없다. 싫음 관둬 라고는 말 외엔 해결책도 없다. 하지만 싫어도 관둘 수 없는 형편이니..

 

 악성.

악성 피부병, 악성 종양, 악성 채무.......

대부분 좋지 않은 명사를 수식하는 부사이다.

그런데 '광고주'는? 좋은 명사 아닌가? 아니 좋기만 하지는 않은 존재인가?

돈은 좋지만 관계는 싫은.. 그 이름 광고주.

 

 20년을 이 악성과 부대끼며 산다. 이젠 화도 잘 나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가르쳐줄 노하우는 없지만 나름 말로는 못할 요령은 이미 생겼음이다.

그나마 그 악성마저 그리워지는 요즘,

내일은 누구를 찾아 갈까  손가락 꼽는 일상이 서글프기도, 고맙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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