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6 (화)
하늘이 참 맑다. 그런데 마음은 시리다.
어린이 날이 낀 사흘 연휴를 지냈다. 거듭되는 교회 일로 심신이 오히려 지쳤다.
아침에 밀린 가게 장을 보는 중에 장모 입원 소식이 왔다. 도무지 회복이 되질 않나 보다.
뒤이어 하늬 입원 소식도 왔다. 아내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덩달아 나도 기운이 쭉.....
계속되는 위장 장애를 제대로 검사하고 멘탈 치료도 같이 해야 한다는 소견이다.
부모와 자식. 같은 일촌인데 아래가 더 아프게 와닿는다. 속물 근성이라 자책해도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장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사람을 더 가라앉게 만든다.
새삼스레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산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다. 조금만 소흘하면 섭섭함 또는 원성이 뒤통수를 어김없이 친다.
그 맨 앞에는 늘 아내가 서있다. 그녀 또한 나만큼 또는 나 이상의 부담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부담"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적절치 않다. "무게"라고 하면 어떨까? 그 또한 마뜩찮다.
세대를 이어가고 그 과정의 중심에 모든 사람이 한 번씩은 자리하게 된다. 나나 아내 또한 그렇다.
따라서 그것은 인생 살이가 그렇듯 지나가는 과정 정도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관념의 장난이다. 현실은 관념을 꿰뚫고 어깨를 짓누르며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수 많은 경우의 수에 대한 계산이 필요하고 간헐적인 좌절과 체념을 강요 당하기도 한다.
혹자는 신앙으로 그 고통을 마취시키기도 한다지만 신앙인인 체 하는 나는 오히려 더 괴롭다.
이도 저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는 자조가 스스로를 공박하기 때문이다.
투덜대지만 시간은 또 흐를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제들은 또 시간 속에서 해결되거나
희석되어 버리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일상의 해는 다시 빛나고 속된 삶은 다시 번잡할 것이다.
지금의 나를 그때의 나는 또 잊어버리고 다가 올 문제를 써 나갈 백지로 대기하겠지.
어�던 지금의 나는 납덩이 같다. 일상을 주렁주렁 매달고 물속으로 가라 앉는 납.
�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