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난 초라하다. 어떤 선배는 비루하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초라'와 '비루', 초라 쪽 형편이 조금 낫게 느껴진다.
내 초라함의 연륜은 제법 오래 되었다. 기억컨데 젖 떼자 시들어 버려 한 번도 맘껏 달려보지 못한 왼 다리 탓이거나 아니면
잘 사는 큰 집과 외가를 드나들며 느꼈던 초라함이 출발이었나 싶기도 하다. 녀석은 지방 국립대에 입학을 하면서 자양분을
얻었고 서울로 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뿌리를 뻗었을 것이다. 가난한 아내를 만나고 초라함을 위장하기 위한 또는 잊어버리기
위한 젊은 날의 객기가 돌아 드는 물처럼 뒷 머리를 후려쳐 도무지 회복 될 수 없는 초라함의 그루터기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 후로 녀석은 봉두난발 곁 가지로 뻗어 초라한 잎을 키우고 초라한 꽃으로 졌다. 그러니 나의 초라함은 비단 요즈음 일 만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최근의 초라함은 새삼스럽다. 종교적 선량함으로도, 주문처럼 외우는 사랑으로도, 겸손을 향한 쇄뇌에도
이젠 더 이상 가려지지 않는 초라함은 밀봉의 틈을 비집고 새어나오고 있다. 허세로, 턱 없는 자랑으로, 독설로, 미망으로.....
나의 초라함은 슬픈 꽃을 피운다. 내 삶을 실은 왼쪽으로 기울어진 나무 한 그루, 세상은 온통 봄꽃으로 눈부시게 빛나건만
나의 우듬지엔 밀봉의 틈을 비집고 고개 내민 초라한 입술만이 가득하다. 이쯤되면 요즈음의 난 차라리 비루하단 말이 맞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