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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지는 것들

취몽인 2021. 1. 10. 15:07

 

 

 

 

비워지는 것들

 

 

 

1. 

농투성이에게 한 상구 벌초 따위는 식은 죽 먹기

솟은 땀 마르기도 전에 예초기의 진압은 끝났다

모근이 드러난 아버지의 땅은 초라하다

기억이 모두 떠난 땅속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급하게 새겨진 비석은 모로 기울었다

聖徒 金海金公熙太之墓 곁으로 푸석한 이름 둘

새겨지지 못한 어머니는 어색한 터로만 쪼그리고 있다

이장(移葬)을 한다면 비석과 어머니의 빈 터는 어떻게 해야하나

 

2. 

한참을 지나 어머니는 빈 종이컵을 들고 다시 나왔다

도저히 안 나오는구나

피를 뽑는 검사실 직원의 바늘끝이 곤두선다

물을 부지런히 마셔보는 수 밖에

정수기로 이어져 연신 물을 들이키는 굽은 등걸

바싹 마른 물관은 쉬 차오르지 않는다

한 나절 금식에 껍질이 되는 나무 한 그루

뇨의(尿意)는 감감하고 갈라진 우듬지만 천정에 걸렸다

 

3.

마비정 개암나무 곁에 누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부부

어린 날 늘 앞장서 오르던 걸음들이 둥글게 멈췄다

손 위 뒤로 자리를 할 수는 없지

망부석 그늘이 닿는 발치를 더듬어 본다

살 걷어내고 뼈 마저 태운 과거를 묻는 의미

타버린 영혼이 부모 형제를 그리워 할 것인가

사방 한 뼘의 두 자리, 빈 것으로 빈 곳을 채울 계획

등 굽은 어머니는 동쪽만 자꾸 바라본다

 

4.

종아리 정맥에 생긴 피떡이 기어 올라와 폐혈관을 막고 있어요

노인이 드신 여성호르몬제의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자꾸 얼굴에 열이 올라서, 그래서 젖이 이렇게 커졌나보다

빼앗아가는 전진과 다시 채우는 후진의 불화

팔순에 젖이 커지는 건 생명의 이치에 맞지 않아요

피를 다시 묽게 만드는 수 밖에 없어요

 

 

130812 / 2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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