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지는 것들
1.
농투성이에게 한 상구 벌초 따위는 식은 죽 먹기
솟은 땀 마르기도 전에 예초기의 진압은 끝났다
모근이 드러난 아버지의 땅은 초라하다
기억이 모두 떠난 땅속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급하게 새겨진 비석은 모로 기울었다
聖徒 金海金公熙太之墓 곁으로 푸석한 이름 둘
새겨지지 못한 어머니는 어색한 터로만 쪼그리고 있다
이장(移葬)을 한다면 비석과 어머니의 빈 터는 어떻게 해야하나
2.
한참을 지나 어머니는 빈 종이컵을 들고 다시 나왔다
도저히 안 나오는구나
피를 뽑는 검사실 직원의 바늘끝이 곤두선다
물을 부지런히 마셔보는 수 밖에
정수기로 이어져 연신 물을 들이키는 굽은 등걸
바싹 마른 물관은 쉬 차오르지 않는다
한 나절 금식에 껍질이 되는 나무 한 그루
뇨의(尿意)는 감감하고 갈라진 우듬지만 천정에 걸렸다
3.
마비정 개암나무 곁에 누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부부
어린 날 늘 앞장서 오르던 걸음들이 둥글게 멈췄다
손 위 뒤로 자리를 할 수는 없지
망부석 그늘이 닿는 발치를 더듬어 본다
살 걷어내고 뼈 마저 태운 과거를 묻는 의미
타버린 영혼이 부모 형제를 그리워 할 것인가
사방 한 뼘의 두 자리, 빈 것으로 빈 곳을 채울 계획
등 굽은 어머니는 동쪽만 자꾸 바라본다
4.
종아리 정맥에 생긴 피떡이 기어 올라와 폐혈관을 막고 있어요
노인이 드신 여성호르몬제의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자꾸 얼굴에 열이 올라서, 그래서 젖이 이렇게 커졌나보다
빼앗아가는 전진과 다시 채우는 후진의 불화
팔순에 젖이 커지는 건 생명의 이치에 맞지 않아요
피를 다시 묽게 만드는 수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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