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 조정숙
나 가끔 친정으로 돌아가면
금세 엄마의 어린 딸이 되어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몸도 마음도 녹신녹신해져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한 일들
그만 까마득해지고
길을 가다 지나쳐 만난 사람처럼
남편 얼굴도 서먹서먹해져서
엄마 손에서 익은 물김치
호록호록 떠먹어가며 밤새도록
친구 같은 수다를 떨었네.
엄마도 참, 고생이 많수
서로 마음을 만지작거리다가
니,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 한 줄 아나
좀 더 살아봐라 내 맘 알끼다
엄마를 관통한 바람이
목적도 없으면서
천천히 나에게 불어오는
내 속엔 작은 엄마가 있어서
가는 허리가 자꾸 허청거린다.
- 다음카페 '시와시와'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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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은 명절에 시어머니로부터 가장 듣기 좋은 말이 ‘어서 친정 가봐라!’인 반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벌써 가려고?’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도 몇 년 전까지 이야기지, 지금은 별로 들어맞는 말 같지 않다. 요즘 세상에 친정 가는 걸 갖고 시댁 눈치 살피는 며느리 별로 보지 못했다. 설거지 따위를 잔뜩 쌓아놓고 싸가지 없이 내뺄 궁리만 하지 않는다면 명절 당일이라도 친정에 가봐야겠다고 하면 막을 시어머니는 많지 않을 것 같다. 한동안은 시어머니로 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용돈 좀 올려줘라’로 바뀌었다지만, 이 역시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주는 며느리보다 그렇지 않은 며느리가 수적으로 월등히 많은 현실이라 위협적으로 들리진 않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지위와 유세가 예전에 비해 엄청시리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껄끄러운 관계임은 분명하다. ‘봄볕엔 며느리 밖에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년 내보낸다.’는 말이 있고, ‘동지 팥죽그릇은 딸한테 설거지 시키고 대보름 찰밥그릇은 며느리한테 시킨다.’는 말도 있는 걸 보면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정서가 따로 작동하기는 하나보다. 이런 점만 보면 여자는 참으로 복잡 미묘한 존재다. 딸, 며느리, 시누이, 올케, 친정엄마, 시어머니가 한 몸의 역할일 수 있겠는데, 이토록 서로 상반되고 대립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장 순연하고 뜨거운 사랑의 관계가 친정엄마와 딸의 사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시집간 딸에게 친정엄마만큼 애틋한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낌없이 주고도 더 못 줘서 안달이고 여한이다.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 친정엄마인데 딸은 가장 사랑하는 이가 엄마는 아니라며 미안해하는 어느 연극 대사가 있다. ‘좀 더 살아봐라 내 맘 알끼다’란 말은 이 세상 모든 엄마가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건 바로 ‘새끼 낳아 키워봐. 그때 엄마 생각 날끼다’란 말의 은유일 텐데, ‘내 속엔 작은 엄마가 있어서 가는 허리가 자꾸 허청’거릴 때는 서로를 ‘관통한 바람’도 생겨난다.
때로 친정엄마 앞에서 딸은 버릇없고 고약하다. 하지만 딸과 친정엄마는 그저 마음으로 다 안다. 그리고 뒤돌아서 서로에게 미안해서 운다. 딸들은 종종 ‘엄마 땜에 못살아’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늘 맘속으로는 ‘엄마 때문에 산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혹시라도 이번 추석에 시어머니가 친정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긴 연휴임에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곧장 자식 챙기는 일상으로 되돌아갈 처지일 수밖에 없었다면, 오늘 밤 친정엄마에게 전화로 그저 ‘별 일 없지? 그냥 엄마 생각이 나서. 이번 추석에 못가서 미안해, 다음 엄마 생일날엔 꼭 갈께, 미안해 엄마’라고 하면 다 되는 것이다. 뿔따구의 싹도 안 날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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