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舍廊/반고개 추억

골목 - 땅골

취몽인 2015. 2. 10. 23:43

 

 

 

 

골목 - 땅골

 

 

 

 

두류산이 흘러내려

이구못에 고이는 즈음에

서러운 골목이 길었다

 

가을 저녁이면

아주까리 별 잎 뒤에

고추잠자리 주렁주렁 잠자던

들머리를 지나면

숙이 누나 세탁소가 있었고

잘생긴 한수네가 있었다

 

거기서부터가 땅골

가난이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진

흙투성이 골목이 꿈틀댔다

궁디산보다

당산을 더 헤매고 다녔던

조막만한 정도며. 원희며

눈동자만 까만 녀석들이 살았다

 

살아남을 것이다

기운 교복 바지를 치켜 올려 입고

뒤축 닳은 운동화를 꺽어 끌어도

절대 눈을 내리 깔진 않던 녀석들

우르르 걸어 걸어 집으로 가던

가던 길에 사과도 곧잘 훔쳐 먹던 녀석들

그 깡다구가 부러워

윗 골목 살던 나는 땅골을 따라 다녔다

 

낮게 뿌리 내린 시간들은

화려한 꽃을 피우진 못했다

일찌감치 장사로 나선 정도는

내 하교길에서 수박을 팔았고

몇몇은 철공소로 염색공장을 나갔다

더이상 땅골을 따라 다닐 수 없었지만

바지 뒤로 드리워진 꼬리는 오래 남았다

 

우시장은 기억 속에서 조차 사라지고

당산 오르던 흙비탈도 사라진 땅골은

이제 주름을 잃었다

정도는 동네 수퍼와 핸드폰 가게 사장이 됐고

까만 눈동자 주위로 번드르한 세월을 흘린다

굽이치던 모퉁이도

남루한 행진도 모두 매끈해진 땅골

그 바싹 마르고 잔돌 많던 골목은 어디에 있을까

왜 나만 남겨두고 떠나가 버렸을까

 

 

2015.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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