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 김이듬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그날 늦게
연안이 보이는 숲속에 해가 질 때
노을에 뺨을 맞대며
말했지 나는
지금 같다면
바로 지금 같다면
그리하여 그는
정장을 차려입고 시가 전차를 타고 와
매일 같이 그녀의 단골 카페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가진 보석을 팔았을지 모르지
전혀 변하지 않았구려
하얀 수염의 사내가 더 늙은 여자의 손등을 만지고 있다
카페 마르코에서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두고 그들을 본다
내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늦은 저녁을 앞지르는 눈보라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뱉은 말에
가장 청순했던 아가씨는 환청에 실신했던 밤들을 겪었고
상냥했던 심장의 창이 무너져 절망을 위한 노래마저 접었던 날도 있었으리라
그리하여 지금
과거의 한 순간이 지금이어서
광기의 시계는 그날에 맞춰졌다
오, 나는 바로 지금조차 배겨 내질 못하는데
대부분의 지금은 방금으로 끝나는데
바로 내 곁에서 숨을 거두고 묻힌 사람들처럼
시간을 멈추어 가만히 영원으로 순간을 만드는 늙은 연인이여
바로 지금 차 한 잔 더 주문하는 나는 살아있는가
사랑을 떠나 종전을 만들었으니
불과 천일하고 하루 만에 부리나케 불타던 창문을 잊었으니
―계간『포엠포엠』(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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