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하루 에세이

어떤 기다림

취몽인 2017. 9. 5. 14:37

어떤 기다림 1  170826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무기력에 쉬 피로하고 집중도 힘들었다.

그제부터는 왼옆구리에 느닷없는 근육통 같은 게 생겼다. 잠 잘 때 어떤 방향으로 누워도 아파 잠을 설쳐야했다. 
오늘 아침에는 통증이 등 뒤로 옮겨갔다. 파스라도 붙이면 나을까 해서 아내에게 붙여달라 했더니 가슴 아래에
벌레 물린 자국 같은 게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려운가 싶었다.

오전에 강아지 병원 다녀오는 길에 큰 딸이 병원을 가보자 했다. 근육통 따위에 뭔 병원이냐 퉁박을 주고
파스나 사오라고 했더니 약국 가서 약사에게 물어본 모양이다. 대상포진일 가능성이 많으니 파스 붙이지 말고
병원을 가라 했다고 전했다. 왠 대상포진? 웃어넘기고 집으로 왔다. 토마토소스 파스타 뚝딱 만들어 같이 먹고
내의를 갈아 입다보니 벌레 물린 자국이 겨드랑이를 타고 등 뒤로 서너개가 더 생겼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제서야 폭풍 검색을 해보니 거의 대상포진 증상이 맞았다. 근육통. 띠 모양으로 나타나는 포진.. 급기야 꼬리를
내리고 집앞 내과를 찾았다.의사는 웃통 젖힌
나를 보더니 1초만에 '대상포진이네요' 했다. 아뿔싸.

  3주 정도 지나야 나을 것, 고통은 곧 심해질 것, 심하면 며칠 정상생활 힘들 수 있음. 엉덩이 주사 한 대, 사흘 약,
적외선 치료 받고 집에 와 환자모드에 돌입했다.

  누워서 책을 보며 생각을 했다. 주변에 대상포진 경험 한 사람들의 호소들이 떠올랐다. 노모도 작년에 앓으셨다.
어떤 이는 삼년째 아프다는 이도 있고 당시 들은 이야기로 고통지수가 출산통을 상회한다더라 하는 말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아프진 않다. 워낙 수 많은 통증을 견디며 살아온 이력도 있긴 하지만, 그저
등쪽이 심하게 당기고 조금씩 찢는 듯한 느낌을 갖는 정도이다.

  사실은 그래서 한 편 흥미롭다. 앞 사람들의 경험으로 미루어 조만간 만만찮은 통증이 들이닥칠건 자명한 일일 터.
곧 올 녀석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 내가 놓인 것이다. 어떻게 시작될까? 어느 정도일까? 정말 못견딜 정도일까?
못견딜 정도가 되면 어떴게 하지? 등 등 드러누워 별 생각을 다 해본다.

  막상 닥치면 아무 생각없으리란 건 안 당해봐도 안다.
그래도 조만간 다가올 고통을 눈 뻔히 뜨고 기다리는 심정은 제법 스릴을 느낀다. 이런 경험은 참 색다른 일이다.
수술을 앞두고 수술 뒤 고통을 예상하는 것과는 또 좀 다르다. 고통의 진행을 주시하며 기다리고, 그 고통속에 빠져들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시간을 의식하며 보내는 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한 때 경제적으로 완벽한 추락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추락을 예상하고, 예상대로 추락을 당하고, 추락으로 인한 고통 또한 예상대로 겪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인식 속에서 감당했던 고통이란 과정의 공통점이 있을뿐 이 경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때의 절망 대신 지금은 스릴이 있다. ㅎㅎ

  저녁을 먹고 두번째 약을 먹었다. 독하다고 밥 먹고 바로 먹어야 한다고 했다. 독한 스포일러 아닌가?

  녀석이 오늘 밤 올까? 어떻게 올까?



어떤 기다림 2. 170827

아직 본 게임은 시작되지 않았나 봅니다.

감기 걸린 것처럼 두통이 오고 온 몸에 열이 오릅니다.
수포는 띠가 좀 더 길어지고 크기 또한 더해지면서 부풀어 오르는 중입니다. 의사의 말로는
이쯤되면 본격적인 통증이 나타난다는데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어젯밤엔 잠을 거의 못잤습니다.
아파서가 아니라 아마 약기운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덕분에 페친이 한 백 분 늘었습니다. 또 몸의 밸런스에 문제가 생기니 의외로 머리는 맑아지나 봅니다.
몇 가지 일과 관련된 아이디어가 떠올라 메모를 했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내일 회사에 가면 계획서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인 아이디어니까요. ㅎㅎ

  제 얼굴 오른쪽 눈섭 주위에는 약간 얽은 자국이 있습니다. 어릴적 수두를 앓은 흔적이지요.
대상포진이 이 수두 바이러스가 뇌속에 숨어 있다 나이들고 면역력이 약해질 때 다시 살아나
공격을 하는 거라니 참 대단한 생명력 또는 전략입니다.
50년 잠복. 엄청나지 않습니까? 수두를 작은 마마라 고도 하는데 집요한 마마라고 해도 될듯 합니다.
그 집요함 속을 추적해 시를 한 편 쓸까 생각 중입니다.

어쨌든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따라서 스릴도 여전합니다. 아내는 철없다 혀를 차네요. ㅎㅎ


어떤 기다림 3. 170828

드디어 왔다.
주먹으로 가슴을 쥐어박고
송곳으로 등을 찌른다.
꼼짝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출근은 하기로..
오전에 일을 처리하고
오후엔 병원 들렀다 재택근무.
한 며칠은 그렇게 살아야 할 듯.

지금이 들어가는 문 앞이 아니라
나가는 문 앞이기를 바란다.

어떤 기다림 4.  170828

억지로 출근.
억지로 아침 회의.
겨우 조퇴.
병원들러 주사 맞고 소독하고
집에 와서 재택근무.

누가 내 가슴과 등짝을
마구 때리고 할퀴고 있다.


어떤 기다림 5  170829

정점에 온듯.
출구가 저만치 보인다.
소문보다는
무사히 지나가는 듯.


어떤 기다림 6
대상포진 일주일째.

수포가 가슴 중앙에서 옆구리를 횡단해 등 중앙까지 그야말로 띠 모양으로 이어짐.
처음 생겼던 겨드랑이 주변은 물집이 가라앉아 거무티티한 흉터로 굳어가고 다른 부분도 더이상 물집이 퍼지지는 않는 상황.

통증은 그닥 나아지지 않고 계속됨. 특히 새벽녘부터 아침나절까지 심해 잠을 계속 설치고 있음.
통증의 형태는 심한 근육통 같은 증세와 화끈거리며 따가운 증세로 앞의 것이 사람을 힘들게 함.ㅠ

오늘 병원서 의사가 한 말.
바이러스 확산은 멈춘 상태이므로 항생제 투약은 오늘부터 중지. 통증은 앞으로도 열흘 정도 이어질 것. 진통제 투약량을 높인 처방으로 교체. 장거리 운전 등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은 삼가할 것. 가능한 한 안정 모드 유지할 것. 딱지 앉을 때부터 새로운 통증 경험하게 될 것임. 옷깃만 스쳐도 불에 댄듯한.. 뭐 그런..

결론은, 출구가 보이긴 하는데 통로가 제법 길다는 말씀. 일주일은 더, 새로운 통증과 동행해야하니 각오하라는... .

호기심 작동은 여기서 그만, 사실은 며칠 전에 이미 그만.^^  별 수 없으니 계속 참는 수 밖에.,

페친분들, 대상포진 예방접종 하시길..
걸려보니 참 만만찮고 끈질긴 놈입니다. ㅎㅎ

20170905 현재, 통증은 아직 조금 남았고.. 수포는 흉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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