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장수고양이의 비밀> 그리고 브랜드의 힘
몇 주 전 번쩍번쩍한 여의도 IFC몰 한쪽 구석에 구색처럼 자리한 서점을 들를 일이 있었다. 무슨 책을
사겠다는 계획으로 들른 것은 아니고 같이 간 일행들이 따로 일을 보는 한 시간 동안 뭔가를 해야했고
마침 거기에 서점이 있었으니 구색이건 뭐건 내겐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새로 나온 시집이나 한
두 권 살까 뒤적이다 최근에는 시를 읽는 일 또한 만만치 않게 공력이 든다는 생각에 이르자 덮어버렸
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최근에 책을 잘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 같은 저자의 책이야 살
때부터 오래 걸리겠지 생각했으니 안 읽혀도 괜찮은데 오규원교수의 시작법 같은 책은 사실 홀딱 빠져
들어 읽는 것이 정상인데 펼치기가 겁이 나니 답답한 노릇이다. 책상에 시집도 서너 권 꽂혀 있지만 한
두 편 읽어내기도 쉽지 않은데 이놈의 버릇은 물정없이 고집스러워서 뭘 읽지 않고 있으면 안절부절을
못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꼬락서니다. 이럴 때 나름의 해결책은 심심풀이 땅콩같은 에세이를
읽는 것이다. 물론 모든 에세이가 가벼운 읽을 거리는 아니고(정통 에세이야말로 철학서 못지 않으니)
그런 류의 책을 찾아 읽는 것이다.
신작 에세이 코너와 베스트셀러 코너를 양쪽으로 기웃거린 결과 눈에 띄는 (? 마음에 띄는!) 두 권을
양 손에 쥐었다. 한 권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수고양이의 비밀>, 다른 한 권은 김훈의 <삶을 눌러
쓴다>. 둘 다 국내외의 잘나가는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두 권 다 사면 그만이지만 한 번에
에세이를 두 권 사는 일이 익숙치 않아 굳이 한 권을 고르기로 했다. 하루키의 에세이야 워낙 익숙한
그의 말투(글투) 만큼 아무 생각 없이 소소하게 읽을 품질을 보증하는 책일테지만 이것도 요즘 요란한
일제불매운동의 목록에 들어가는가?하는 의문이 들어 잠깐 망설여지고, 김훈의 에세이는 비닐포장으
로 탱탱 싸여져 목차조차 볼 수 없게 해놓아서 내용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러고보니 김훈의 에세
이는 한 두 권 도서관에서 빌려 본 기억이 있는데 유명하다는 그의 소설은 한 편도 읽어 본 적이 없어
정작 작가로서의 김훈을 내가 잘 모르고 있구나 하는 난감한 깨달음도 동시에... 어쨌던 두 권 모두 나
름대로 읽을만 하리라는 믿음은 있었으니 한참을 두 책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책값을 지불한 책의 저자는 하루키였다. 물론 어눌하지만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안자
이 미즈마루의 삽화도 보고싶고, 둘째 딸의 말투를 닮은(아마 하루키의 책을 많이 읽은 그 녀석이 하루
키의 말투를 닮은 것이겠지만) 하루키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굳은 머리를 부드럽게 해주는데 더 유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컸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결국 하루키가 김훈보다는 내게 강력한 브랜드이미지로
남아있었다는 점이 내심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비슷한 효용과 품질을 보장해주는 두 개의 상
품에 좀 더 큰 가치로 여겨지게 하는 것은 결국 브랜드 가치일테니까. 내가 오래된 광고쟁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김훈이라는 브랜드보다 하루키라는 브랜드에 대한 기대치가 더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내 속의 브랜드 가치 기준일뿐. 객관적으로 김훈이 하루키보다 못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김훈의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으니 <라면을 끓이며> 정도의 에세
이로 만난 김훈은 내 속에선 결정적으로 불리한 경쟁을 한 셈이긴 하다.
예상대로 하루키릐 에세이는 소소했다. 하루키 본인의 말마따나 뭘 이런 걸 다 쓰나? 싶을 이야기들이
하루키 특유의 멀뚱한 목소리로 담겨있었다. 늙은 고양이, 마라톤, 러브호텔의 이름 따위에 대한 투덜
거림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삶의 면목을 이야기하는 하루키는 여전히 소년이다. 깊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가볍게 말해도 깊은 뜻은 담을 수 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일이 훨
씬 더 힘든 일이라고 난 생각한다. 최근 딜레마에 빠진 내 詩도 사실은 하루키 스타일에 대한 두려움
비슷한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렵고, 심각하고, 미학적 깊이를 담아내야만 좋은 문학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주류의 강박일 수 있다. 그 강박은 제법 그악스러워서 나같은 얼치기들은 쉬 휘둘리고 제 길마
저 잃어버리기 쉽다. 하루키를 읽으며 내 머리의 얽힌 그물은 다소 느슨해졌으며 다시 다른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루키의 브랜드 가치는 적어도 내겐 제 몫을 다 한 셈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안자이 미즈마루씨가 이미 사망하셨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부디 어눌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영면
하셨길 빈다.
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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