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안개
삐걱이는 침대를 타고 항해는 언제나처럼 오세아니아를 향한다. 모로 누워 천천히. 대부분 욕지도 근처를 지날 무렵 표류한다. 깨어보면 母港에 묶인 채로 발견되지만. 어제는 순천쪽으로 흘렀다. 낮은 바다 위로 둥그런 갈대숲이 덩그러니 떠있었다. 침대는 뻘에 걸려 비틀거렸다. 습한 바람이 불고 어둠이 밀려왔다. 눈을 감고 떠난 항해에 어둠이라니. 눈을 비비자 손끝에 어둠이 묻어나왔다. 거뭇한 그것이 어둠은 아니라는 건 미끈거리는 감촉이 알려줬다. 안개였다. 검은 안개가 세상의 윤곽을 지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기름 냄새가 났다. 검은 안개 속으로 시커먼 城이 불쑥 솟았다. 비잔틴양식으로. 둥글고 뾰족한 첨탑들이 안개를 뚫고 검게 빛나고 있었다. 기름 냄새는 점점 더 코를 찔렀다. 침대곁으로 검은 오리 한 마리가 흘러갔다. 기름에 찌든 검은 깃털을 반짝이며. 주변은 온통 검게 번들거렸다. 검은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던 城도 번들 거렸다. 검은 스테인드글라스. 검은 타일로 솟은 아라베스크. 안개가 스치자 침대도 검게 빛났다. 오리는 저만치 흘러 뒤집어졌고 금새 검은 안개로 덮혀 사라졌다. 침대가 검은 기슭에 닿았다. 발을 딛자 미끄럽게 빠져들었다. 희미한 빛을 받아 무지개빛으로 산란하는 기슭을 기어 올랐다. 온몸이 검게 빛났다. 금방이라도 타오를듯 안개는 주변에서 휘발했다. 城은 좀 더 가깝게 검어졌다. 스르르 침대가 미끄러져 안개 속으로 떠내려갔다.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침대는 금새 검게 지워지고 안개는 촘촘하게 앞을 가렸다. 城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렸다. 안개를 헤집고 검게 흘러왔다. 손을 뻗어 검은 물에 담궜다. 화르륵 타오르는 시간이 희미한 연기를 뿜었다. 검은 연기. 손은 그새 검게 그을렀다. 안개가 하늘로 솟자 城도 따라 솟았다. 검은 기둥을 드러내며 검은 풍경을 거느리고. 꼼짝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검은 기슭과 검은 손뿐. 저멀리 검게 침대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검은 안개에 밀려. 번들 거리는 어둠속으로 푹푹 빠지는 걸음을 내딛었다. 다시 침대에 올라야 한다. 검은 안개가 검게 걷히기 전에 돌아가야한다. 城은 사라졌고 내 얼굴이 자꾸 지워진다. 검게. 번들거리며.
20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