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생 시인이 83년도에 낸 시집.
내 대학 졸업반 시절이다. 전두환의 서슬은 여전히 퍼랬지만 세상은 호경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기업들은 수출에 열을 올렸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은 별 문제가 없었다. 모두들 대기업 종합무역상사 기획실을 가고 싶어하던 시절이었다. 대학 4년을 술과 가난과 방황(방탕)으로 보낸 나같은 가짜 대학생도 그해 말 거뜬히 대기업 기획조정실에 합격했다.
그렇게 시절이 따뜻해지는 뒷편에 스물아홉 시인은 힘든 세상을 시집에 담았다. 가난한 동네, 막장의 마을, 허물어진 고향을 찬찬히 바라보며 시인은 소리없는 고함을 질렀다. 바닥에서 언덕을 오르는 일, 그것도 급하게, 억지로 만드는 일은 언덕의 경사 위로 숱한 고통을 쌓을 수 밖에 없다. 시인은 그 경사 위로 덮힌 아픔들을 바라본다. 이십대 후반의 뜨거운 눈으로. 하지만 대부분 차분히 주목하는 문체로.
세월은 흘러 내가 사회로 나선 지도 어느듯 36년. 이 시집의 나이와 같다. 나는 이제 그 사회의 경계로 밀려나와 물러가는 사람들의 긴 줄 끝에 설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자리에서 오래 된, 그러나 나와 다른 깊이로 태어났던 시들을 읽는 일은 새삼스러운 부채감을 낳는다.
나는 그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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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의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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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반사
모자원 고개
해 저무는 비탈을
그들은 절룩이며 내려오고 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머리가 뒤로 돌아가는 아이는
눈알도 돌아가고 있다
손가락이 여섯 개 달린 어린 날
육손이는
어이, 육손 너하곤 안 놀 거야
그러면 삐치고
울고불고하던 육손이는 자라서
어디를 성큼성큼 걷고 있는지
목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두 발이 공중에 뜨는 아이는
몸뚱이도 공중에 뜨고 있다
오늘도 삐걱거리며 그들은
모자원 고개
해 저무는 비탈을
내려오고 있다
다친 어릿광대들 모양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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