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땅위에 살았던, 이젠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수한 생명체들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없어져버린 것일까?..
공기 속에 가득한 이 먼지들은 무엇인가?
한때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과 동식물들의
풍화된 모습이 아닌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사랑했을지도 모를,
얘기하고 만지고, 그 눈동자만 생각해도
온몸에 열이 나고 떨렸을 어떤 아름다운
몸을 내가 마시고 있지 않은가?'
비가 오고 먼지가 날릴 때
그 빗 속에
그 먼지속에
내 아버지의 흔적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가정.
그 오래된 존재와 소멸과 순환에 대한 고민을
시인은 30년전에 이미
이 시집에 담았구나.
세상에 詩로 쓸 수 있는 새로움이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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꼽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에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내리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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