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舍廊/詩 읽기

태아의 잠 / 김기택

취몽인 2020. 3. 24. 10:25

 

'한때 땅위에 살았던, 이젠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수한 생명체들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없어져버린 것일까?..

공기 속에 가득한 이 먼지들은 무엇인가?

한때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과 동식물들의

풍화된 모습이 아닌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사랑했을지도 모를,

얘기하고 만지고, 그 눈동자만 생각해도

온몸에 열이 나고 떨렸을 어떤 아름다운

몸을 내가 마시고 있지 않은가?'

 

비가 오고 먼지가 날릴 때

그 빗 속에

그 먼지속에

내 아버지의 흔적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가정.

그 오래된 존재와 소멸과 순환에 대한 고민을

시인은 30년전에 이미

이 시집에 담았구나.

 

세상에 詩로 쓸 수 있는 새로움이란 없구나.

 

--------------------------

 

꼽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에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내리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