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한 시인의 첫 시집을 읽고 시간이 지난 후에 나온 후속 시집을 읽는 일은 나름 재미가 있다.
얼마전 김기택시인의 처녀시집인 '태아의 꿈'을 읽으며 사물에 대한 시인의 시선과 해석, 상상력에 감탄했었다. 그 때문에 이 시집을 다시 사서 읽었다. 2005년에 나온 시집이니 그 또한 먼 시절의 시들이다.
세월은 시인의 삶에 조금의 여유를 허락한 듯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물론 아직도 허름한 상계동을 버스를 타고 오가는 시선이지만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들의 외곽이 말랑해진 느낌이다.
누가 그랬다. 수많은 시인들이 첫 시집의 성과를 넘지 못한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것은 치열함의 차이일 수도 있고, 배고픔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는 시를 배신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리라.
이 시인은 그렇지 않다 생각한다. 삶은 익어가는 것이다. 글도 시도 익어가는 삶을 닮는다. 늘 악을 쓰고 눈을 부라리며 살 필요는 없다.
똑 같은 소는 없다. 소의 눈빛도 익어간다. 시인은 목소리만 바뀌었지 생각이 바뀐 건 아니다. 그게 정상이다. 다음 시집을 또 찾아봐야겠다.
2005년 문지
'이야기舍廊 > 詩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만히 사랑을 바라보다/문태준 엮음 (0) | 2020.04.08 |
---|---|
질문의 책 /파블로 네루다 (0) | 2020.04.08 |
현대문학 4월 (0) | 2020.03.30 |
詩 없는 삶 / 페터 한트케 (0) | 2020.03.24 |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송찬호 (0) | 2020.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