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 밤 제인구달의 책을 읽던 중에 좀 낯선 장면을 만났다. 구달이 관찰하고 있던 침팬지 중에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 침팬지가 있었으며 종족들에게 학대를 받아 갓 낳은 새끼들이 학살되고 그 또한 폭력에 희생되고마는 이야기였다.
침팬지가 소아마비에 걸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니 사실은 생각을 해볼 여지가 전혀 없었던 사실을 알았다는게 더 정확한 말이겠다. 침팬지가 사람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이니 사람이 앓는 소아마비를 그들도 않을수 있으리라. 그럼 소나 돼지는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을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그보다 중요한 건 소아마비에 걸린 침팬지가 그 사회에서 차별과 학대같은 피해를 당하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는 이 사회처럼..
오늘 아침 출근 길에 라디오에서는 의미심장한 멘트와 음악 선곡이 이어졌다. 디제이들은 차분한 목소리로 오늘이 장애인의 날임을 알렸다. 건강한 사회가 당신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기념하노라 하는 공익의 표정으로. 그렇군, 오늘이 장애인의 날이군.
나는 제인구달의 침팬지처럼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았다.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 했겠지만 어쩔 수 없이 후유증이 남았다. 내 왼쪽 다리는 현저히 가늘고 무릎은 곧게 펴지지 않으며 길이도 오른쪽 다리에 비해 4센티미터 정도 짧다. 걸으면 몸이 왼쪽, 앞쪽으로 기울어져 절게된다. 왼쪽 대퇴부에서부터 다리까지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달릴 수는 없다. 어려서는 몸이 가벼워 절면서도 달릴 수는 있었지만 나이가 든 최근에는 몸이 무거워졌고 그 무게를 약한 관절들이 감당하지 못해 뛰기는 커녕 긴 거리를 걷는 것도 무리인 지경이다.
어릴적에는 또래 친구들에게 절뚝발이라는 놀림도 꽤 많이 받았다. 가는 다리를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 대중목욕탕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가지 않았다. 더 나이가 들어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나서야 남들 시선을 어느 정도는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최근에는 오히려 내가 내 신체적 분수를 모르고 건방을 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가 됐다.
대신 어릴적부터 익숙해진 행동의 제약은 반대급부로 문학이나 미술 등 예술적 감수성을 제공했고 아직도 그 언저리에서 나는 액티비티 대신 센서티브한 삶에 매달려 살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 보행과 주행이 힘든 하지 장애를 인정받아 군복무도 면제 받았지만 현행 법은 하지 장애의 기준을 다리를 이루는 세 관절인 대퇴고관절, 무릎 관절, 발목 관절 중 하나 이상이 완전히 기능을 잃어 움직일 수 없을 경우에만 장애 판정을 내주게 되어있다. 세 관절이 모조리 시원찮지만 부실하게나마 기능이 남아있는 내 경우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법은 판정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너는 장애인이 아니라는데 굳이 장애인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좀 불편해도 장애인이 아니라는데 자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님의 노력과 내 스스로의 운으로 그나마 살만한 환경 속에 있는 나는 괜찮지만 이 현실적인 장애로 인해 보다 나은 삶을 살 기회를 빼앗기고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나와 비슷한 장애우들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비장애인들이 도식적으로 규정해 놓은 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삶에서도, 제도의 지원에서도 배제된 채 살아가고 있다.
분명 그들도 장애인이다. 관절이 다 작동해도 있으나마나 한 관절도 있는 법이다. 그들도 보호받고 사회적배려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침팬지도 소아마비에 걸릴 수 있고 사회 속에서 고통 받는다. 움직일 수 있을뿐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더 큰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고통은 장애가 아니라고 누가 함부로 정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