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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Ethics / 데이브 로빈슨

취몽인 2020. 5. 24. 12:40

도덕이라는 것.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철학이라는 류의 생각을 시작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규정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과제.

선이란 무엇인가? 옳고 그름은 무엇이 결정하고 누가 판단하는가? 옳고 그름이라는게 있기는 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고 수용하고 행동에 적용하는 도덕적 기준은 스스로 믿을만 한 것인가? 나는 누군가가 내게 몰래 강요한 도덕적 기준이라는 이해관계에 세뇌 당한채 그것을 옳다고 믿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건 누구인가? 정치? 아니면 그 뒤의 간악한 자본? 그럼 그들에게는 어떤 도덕 기준이 있을까? 그들에게는 보편적 선이란 어리석은 생각일 뿐일까?

철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류 정신을 탐구하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윤리학은 어쩌면 철학의 뿌리일지도 모른다. 정신의 가치, 유용함 따위. 인간 사회의 유지와 개인적 삶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서의 윤리학은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헤매고 있는 듯 보인다.

옳은가 하면 그르고, 바르다 생각하면 허술하거나 어느 힘 있는 집단들에 의해 왜곡된 것을 발견하게 되고마는 윤리라는 어설픈 뼈대.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윤리와 도덕의 잣대 위에서 가다가 멈추고 돌아서고 하며 살고 있지만 그 잣대에 대해 별 의심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의심하는 몇몇 사람일 뿐이다.

최근 십 년 내의 우리나라 정치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윤리 기준의 혼란은 딜레마에 빠진 또는 길을 잃은 윤리학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진영을 나누고 각자 제편을 세뇌시켜 담론의 점유율을 확대하려는 집단이 있다. 그들은 자본, 권력, 언론, 집단 또는 반집단으로 군중들 뒤에 드리워져 있으며 군중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장한다. 대통령의 자살, 촛불, 탄핵, 태극기부대, 조국, 최근의 정의연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성은 편을 나눈 사람들이 높이지만 정작 목소리는 뒤에서 내는 얼굴없는 권력들. 이들 두 집단에게 윤리는, 도덕은 아전인수의 논리를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기준에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너와 나 우리는 그 집요하고 은밀하고 용의주도한 파도에 그저 휩쓸릴 뿐.

현 단계에서 내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윤리학의 메세지는 그저 푸코의
'강자는 이성의 영역을 주장하고 허용될 수 있는 사고와 행동이 무엇인지 정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부분적이고 지엽적 이기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며 따라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확신시킬 수 있다. 그런 것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미친 자 또는 불합리한 자로 낙인찍히고 그에 상응하는 취급을 받는다.' 라는 주장뿐이다.

우리는 자본이라는 리바이어던에게 세뇌당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정의와 도덕을 주장하는 목소리조차 자본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거래된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윤리학이 어려운 이유다. 자본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만화책 한 권 읽고 말도 생각도 너무 많아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