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베개
더 둥글어질 수 없는 무릎을 베고 잔다 머리가 부드럽게 무릎으로 스민다 빛과 소리를 빨아들이는 무릎은 오래된 모퉁이여서 더러운 맨발로 도망쳐 온 얼굴들의 국경이 된다 살과 뼈가 서로를 억세게 잡아당기는 곳, 뿌리내린 비누 향기가 덩굴손을 뻗는다
잠꼬대는 무릎 속에서 완전한 문장이 되고 그 문장들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내 이마가 스며들수록 선명해지는 무릎의 풍경이 맹그로브숲을 펼쳐 놓는다 진흙에 파묻힌 갑각류들을 주워 들면 전부 색채를 잃어버린 어제의 이름들, 살갗의 마찰이 일으킨 습한 바람 속에 꺼끌꺼끌한 눈썹들이 날아다닌다
호흡과 체온마저 무릎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늪에서 이마를 건질 수 없다 잔뜩 주워 담은 이름들을 버리면 꿈이 가벼워진다 당신의 무릎이 떨리는 건 홍수림이 곧 사라진다는 신호, 숲이 투명해지기 전까지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모두 지닌 무릎을 혀로 핥아 습지대의 지도를 그려야만 한다
초록 모래 속에서 기어 나온 물고기가 태양을 향해 헤엄쳐 가는 꿈을 꿨어 당신의 무릎과 내 슬픈 꿈 중 어느 것이 진짜 신기루일까 다가오지 마, 뺨에 돋아난 돌이끼가 연한 피부를 다치게 할지 몰라 우리 언제 만났었지? 금방 어두워지는 저녁이 당신 무릎에서 푸른 눈을 뜨고 있어 꿈속 물고기를 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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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참 느닷없다.
이 시집이 나온 지가 벌써 이년반이 지났다. 처음 소식을 듣고 시집을 사서 읽을 때의 기쁨이 생각난다. 드디어 시집을 냈구나. 이詩人.
빠르게 읽었었다. 왜? 어차피 잘모를테니까. ㅎㅎ 그랬다. 시인을 잘 안다고 그 시인의 詩를 잘 알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시인은 잘 알지만 그 역시 내가 닿기엔 멀리 있는 젊은 시인이었으니. 그래도 읽었다. 詩는 멀었고 사람과 생활과 익숙한 풍경만 남았었다.
이 년 반의 시간은 굼뜬 독자도 조금 자라게 했다. 일주일 동안 조금씩 다시 읽었다. 제대로 읽고 싶어서. 다행히 한 걸음 정도는 더 시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인은 맑고 건강하다. 그럴 수 없을텐데 그렇다. 그렇게 보일 수도, 보이고 싶을 수도 있다. 詩는? 그런 고민이 없다. 세로로 세운 두 무릎 사이로 고개를 심고반지하에 슬어 있는 설움을 노려본다. 떠나지 못하는 추억과 기억들. 그 녹슨 희망을 바라본다. 현실은 치열하게 오래된 골목을 뛰쳐나가고 있지만 정서는 아직 발목을 빼지 못한다. 詩는 한 발 늦게 탈출하는 중이다. 그 골목을 나도 안다. 몇 번이고 꺾이며 숨어드는 골목. 벗어나도 곧 다시 붙들려 돌아오는, 오래된냄새들이 붉은 녹처럼 흐르고 쌓이는 곳.
멀리 간 詩도 있다. 발목을 놓쳐서 아프겠지만..
얼마 전 시인은 그 골목을 벗어났다. 제대로. 산이 보이고 그가 유난히 좋아하는 물(?너무 작다)이 집앞으로 흐르고 창문 가득 햇살이 쏟아지는 곳으로 이사했다. 아예 서울을 벗어났다.
발목도 제대로 챙겨서 갔기를 바란다.
희미한 냄새들을 잘 말려 펄펄 뛰는 쏘가리 같은
詩를 걸어 올렸으면 좋겠다.
한 반 년 뒤쯤 다시 이 시집을 읽어볼까 한다.
그때는 또 다른 시인을 만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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